[현장에서/김예윤]관제 소비자는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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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윤 사회부 기자
김예윤 사회부 기자
“저희 부서 성과평가에 들어가니 좀 부탁드려요.”

며칠 전 서울시 보조금을 받는 민간 법인단체의 관계자 A 씨는 서울시 공무원으로부터 이런 내용이 담긴 이메일과 전화를 받았다. 시가 만든 모바일 간편 결제 시스템인 제로페이의 법인용 확장판 ‘제로페이비즈(Biz)’에 가입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시는 지난해 12월 제로페이 출시 이후 가맹점을 늘리는 데 총력을 기울여왔다. 지난 한 달 동안 가맹점이 10만 곳 넘게 증가했다. 19일 현재 제로페이를 쓸 수 있는 점포는 22만 곳이 넘는다. 하지만 제로페이 사용 실적은 미미하다. 올해 1∼3월 제로페이 결제 액수는 13억6000여만 원이다. 여신금융연구소가 발표한 같은 기간 전체 카드 사용액 200조8000억 원의 0.0006%에 불과했다.

이에 지난달 말 서울시는 제로페이비즈를 출시했다. 서울시와 시의 보조금을 받는 민간 법인단체가 업무 추진비 등을 제로페이로 결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보조금을 받는 단체들을 사용자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메일을 보냈다.

“모두 현안으로 바쁘신데ㅠㅠ 요구사항이 많네요. 무슨 보조사업자 제로페이 사용인지….”

A 씨가 시 공무원으로부터 받은 메일 내용 일부다. 이 공무원은 메일에 “이번 주 안에 가입을 하되 못 할 경우 첨부파일에 사유를 써 달라”고 적었다. 이메일에 첨부된 엑셀 파일에는 시 보조금을 받는 민간 법인단체 수십 곳이 가입 여부를 확인한 ○ 또는 ×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A 씨는 “서울시 여러 부서에서 중복으로 가입 요청이 왔다. 머릿수 채우기에 혈안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법인이 제로페이비즈를 사용하려면 시금고 은행에 담당자 지정 및 사용자 인증등록 등을 위한 각종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제로페이비즈는 개인소득공제 40% 혜택이 있는 개인용 제로페이와 달리 특별한 혜택이 없다. A 씨는 “어떤 법인이 이득도 없이 그런 복잡한 절차를 감수할까 싶다. 보조금을 지급하는 시에 밉보이면 좋을 게 없어서 가입은 하지만 허수(虛數)만 늘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원순 서울시장은 3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의 금융투자설명회에 참석해 “서울시는 올해 제로페이를 시장에 선보여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제로페이를 서울시가 성공시킨 핀테크의 예로 든 것이다. 박 시장은 제로페이의 잠재적인 확장성을 염두에 두고 이런 평가를 했는지 모르겠다. 또 시 관계자는 “공공 부문에서 먼저 공적자금을 제로페이비즈로 결제해 소비가 늘어나면 민간에도 제로페이가 얼마든지 확산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의 행정력을 동원해서라도 제로페이의 좋은 점을 알리게 되면 결국 시장에서 제로페이가 인정받게 될 것이란 의미다. 하지만 시 보조금을 받는 민간 법인단체뿐 아니라 일반 대기업이 제로페이비즈를 매력적으로 느끼려면 법인세 감면 혜택 등 확실한 유인 조건이 있어야 한다. 관제(官製) 공급자는 있어도 관제 소비자는 없다.

김예윤 사회부 기자 yeah@donga.com
#제로페이#제로페이비즈#박원순 서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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