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승헌]프랜시스 후쿠야마의 2년 전 예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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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에게 협치는 생존 문제”, “거부 정치로 정치권 ‘자폭’할 수도”

이승헌 정치부장
이승헌 정치부장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2017년 5월 10일 오후. 몇 차례 e메일을 주고받고 역시 몇 번의 시도 끝에 기자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와 통화할 수 있었다. ‘역사의 종말’ 등의 저서로 잘 알려진 국제정치학계의 스타이자 현대 정치의 문제점을 열정적으로 진단해 온 그에게 새 정부에 대한 조언을 듣고자 했다. 그런데 후쿠야마 교수는 인터뷰 1시간 중 절반을 협치(協治)와 적폐청산에 할애했다. 이런 내용이었다.

―문 대통령이 취임식 전에 야당을 방문한 것을 어떻게 평가하나.

“꽤 좋은 징조(pretty good signal)이지만 그런 건 기본이다. 장담하건대 문 대통령이 야당과 지속적으로 소통하지 않으면 ‘거부 정치’(veto+cracy)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누가 누굴 거부한다는 건가.

“내가 몇 년 전부터 사용하고 있는 표현인데, 양당 체제에서 서로 반대만 하다가 정치적 교집합을 찾아내지 못하면서 자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상 첫 대통령 탄핵이 이뤄졌는데 대화가 쉽겠나.

“협치는 선택(option)의 문제가 아니다. 문 대통령은 승자다. 그렇다면 야당에 남은 건 반대할 권리(veto)밖에 없다. 그런데 민주주의에선 대통령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문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서라도 몇 번이고 먼저 야당을 찾아가야 한다. 지금은 잘 모를 테고 나중에 절감하게 될 것이다.”

―문 대통령이 선거 기간 내건 적폐청산은 어떻게 생각하나.

“대통령이 적폐청산을 국정 캐치프레이즈로 사용하면 상대방이 가만히 있겠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취임 전부터 ‘워싱턴의 오물을 치워버리겠다(drain the swamp)’고 했다. 그런데 지금 어떤가. ‘오물’이라던 정치권 협조 없이는 법안 하나 통과시킬 수 없다. 혁명이 아닌 이상, 협치를 통해 정치적 자산과 성과가 쌓여야 과거를 수정하고 시스템을 개혁할 동력을 얻는다. 이는 동서 모두 같은 이치다.”

문 대통령이 2일 사회 원로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선(先)적폐청산, 후(後)협치 가능’ 원칙을 선언하자, 뭐에 이끌리듯 떠올라 뒤적인 게 후쿠야마 교수의 2년 전 인터뷰였다. 당시만 해도 그냥 미래에 대한 전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고수의 통찰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장면이 적지 않다. 원로 간담회에서도 후쿠야마 교수와 비슷한 조언이 있었다. 정치권의 오랜 책사 중 한 명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패스트트랙 정국 해법과 관련해 “이런 국면에서는 대통령이 나서지 않으면 문제를 풀기가 힘들다”고 한 게 그랬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여야 갈등과 협치 부재가 오롯이 문 대통령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후쿠야마 교수가 2년 전 인터뷰에서 가장 강조했던 것도 ‘거부 정치’ 그 자체였다. 현대 정치가 좌우로 극단화되면서 서로 반목하는 게 하나의 현상(status quo)이 된 것이지, 누구의 잘못이 거부 정치의 1차적 원인은 아니라고 했었다. 하지만 이는 바꿔 말하면 거부 정치 현상을 그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제 아래선 결국 대통령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10일 취임 2주년을 맞는 문 대통령이 이후 어떤 정치적 행보를 할지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이다. 그런데 한 가지. 2년 전 지금 상황을 예언했던 후쿠야마 교수는 거부 정치를 해소하지 못하면 그 후 어떤 일이 생길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거부 정치가 계속되면 결과적으로 정치권 전체가 자폭할 것이다. 그럼 기성 정치권 모두 정치 혐오의 대상이 된다. 선거를 앞두고 더 그럴 것이다.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장담할 수 있다(I personally guarantee).”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프랜시스 후쿠야마#거부 정치#적폐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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