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 18번 강조하며 ‘中 5·4운동 100주년’ 의미 되새긴 시진핑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3일 15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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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벌) 정부의 수장은 청나라가 멸망한 뒤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봉건 전제정치를 계속했습니다. 이런 정부가 주권을 팔아먹었어요. 5·4운동은 (외세에) 주권을 넘기지 말라는 반제국주의 운동이자, (봉건적) 정부를 반대한 반봉건 애국운동이었습니다.”

중국의 5·4운동 100주년을 이틀 앞둔 2일 오전. 100주년 기념 전시인 ‘5·4현장’이 열린 베이징(北京)신문화운동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은 톈안먼(天安門) 인근 옛 베이징대 건물인 베이다홍러우(北大紅樓)에 있다. 이곳에서는 5·4운동 사진 180여 장과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따가운 햇살로 무더웠던 이날 기념관은 매우 붐볐다. 이곳에서 기자와 만난 런(任)모 씨(50)는 “5·4운동은 민주주의와 독립을 각성시켰다. 학생들이 민중에 이런 의식을 일깨웠다”고 말했다. 산시(山西)성에 사는 그는 대학생 아들과 함께 기념관을 찾았다.

● “구시대적 정부에 항거한 구국운동”


1915년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는 일본과 타협해 독일이 확보했던 산둥(山東)반도의 이권 이양 등 일본의 권한을 대폭 허용하는 21개 조항을 수용했다. 1919년 1월 파리평화회의에서 산둥반도를 아예 일본에 넘기기로 결정하자 같은 해 5월 4일 베이징 대학생 등 3000여 명이 톈안먼 일대에서 반대 시위를 벌였다. 5·4운동의 시작이었다. 5·4운동은 주권을 위협하는 외세와 이들과 결탁한 정부에 저항하는 정치운동으로 민주주의와 자유 등 새로운 사상을 일깨운 신(新)문화운동이었다. 당시 군벌정부는 학생들을 탄압했다.

‘5·4현장’ 전시실에는 1919년 6월 11일 베이징시민선언과 관련된 복제 물품도 있었다. 선언은 △대일 외교에서 산둥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말고 일본과 1915~1918년 맺은 모든 밀약을 취소하라 △책임 있는 관료들을 퇴진시키고 베이징에서 추방하라 △베이징 군경 사령부를 없애라 △베이징 보안대를 시민 조직으로 바꿔라 △시민은 절대적인 집회와 언론 자유권을 가진다 등 5개 요구사항을 내세웠다. 런 씨의 말처럼 5·4운동은 국민의 주권을 팔아넘기면서 국민의 자유를 탄압한 정부에 대한 본격적인 항거였다.

전시는 5·4운동의 시발점인 5월 4일 시위에 대해 “(당시 군벌) 정부에 (일본과의) 조약을 체결하지 말라고 요구하던 분노는 일본과 밀약에 서명한 내각과 외교관으로 향했다”고 설명했다. 1919년 6월 많은 베이징 학생들이 거리에서 연설했고 정부는 군경을 동원해 학생 약 1000명을 체포했다.

초등학생 딸과 함께 기념관을 찾은 상하이(上海) 거주자인 리징 씨(李靜·39)는 “오랫동안 쌓여온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의 한 초등학교 교사인 리(黎)모 씨(40)는 “청년들이 민중을 자각시켜 생사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한 애국주의 정신”이라고 평가했다.

● 시진핑 “공산당에 복종하는 애당 애국주의”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3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5·4운동 10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5·4운동의 핵심으로 ‘애국주의 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1시간 이상의 기념 연설 중 애국을 18번이나 강조하며 5·4운동이 애국운동이었다고 콕 집어서 강조했다.

하지만 전시를 찾은 중국 시민들이 5·4운동의 정신으로 거론하던 ‘애국’과는 뉘앙스가 달랐다. 시 주석은 ‘공산당에 복종하는 애국’을 강조했다. 그는 “신시대 중국 청년은 (공산)당의 말을 따라야 하고 당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애국하지 않고 조국을 속이고 배반하면 국가와 세계에 매우 창피한 일이고 발붙일 곳이 없게 된다”며 “모든 중국인에게 애국은 본분이고 책임”이라고도 했다. 시 주석은 “신시대 중국 청년에게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은 입신의 본분”이라며 “애국주의의 본질은 애국과 애당을 견지하는 것이며 고도로 통일된 사회주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기념식에는 어린 학생들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참석했다.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는 등의 노래도 제창했다. 기념식장에는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 주변에서 긴밀히 단결하자’는 붉은색 대형 현수막이 붙었다. 익명을 요구한 중국인 학자는 본보에 “5·4운동은 낡은 군벌과 정부답지 않은 정부로 인해 빠진 도탄으로부터 국가를 구해 인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애국이었다”고 지적했다.

5·4운동 정신에는 항일운동의 성격도 있었지만 시 주석은 연설에서 일본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미중 패권 경쟁에서 미국의 동맹인 일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중일관계를 개선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이어서 시 주석이 의도적으로 이를 거론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 반정부 학생운동 의미 축소

시 주석은 5·4운동에 대해 “청년 지식인이 선봉에 섰다”고 평가하면서도 현재 중국 청년들에게는 ‘당에 대한 복종’을 강조했다. 5·4운동이 가진 반(反)정부 학생시위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다음달은 1987년 6월 4일에 일어난 톈안먼(天安門) 시위 30주년이다. 5·4운동 100주년과 톈안먼 시위 30주년이 겹치면서 이를 기념하는 시위가 벌어질 가능성을 중국 정부가 차단하려고 총력을 다 한다는 관측이 많다. 이 때문에 5·4운동 100주년이지만 대대적인 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나온다.

2일 찾은 기념관의 또 다른 전시관에는 1919년 5월 4일 베이징대 등 13개 대학 학생들이 톈안먼에서 집회를 한 뒤 남쪽의 첸먼(前門)을 거쳐 톈안먼이 있는 구공(古宮·자금성) 동쪽의 차오루린(曹汝霖) 당시 군벌 정부 외교차장의 집으로 행진한 경로가 공개돼 있었다. 당시 분노에 찬 학생들은 일본에 각종 권리를 팔아넘긴 매국노로 지목된 차오루린의 집을 불태워버렸다.

베이징시 정부는 1~4일 1호선 천안문동역~천안문서역 구간과 2호선 첸먼 역을 임시 폐쇄했다. 3개 역을 일직선으로 이으면 톈안먼과 톈안문 광장을 둘러싼다. 베이징시는 3개 역을 폐쇄한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 정부가 1일 노동절 휴무를 하루에서 갑자기 4일로 연장한 게 바로 5·4운동 100주년과 톈안먼 사태 30주년 집회를 사전에 막기 위한 조치라고 보도했다.


▼“왜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인가”…3·1운동에서 교훈 얻은 中 5·4운동▼

중국의 5·4운동
중국의 5·4운동
“이번 조선의 독립운동은 위대하고 진실하며 비장했다.…중국의 대학생과 기독교도들은 어찌하여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것인가.”

중국 5·4운동의 총사령관 격이자 신문화운동의 기수로 일컬어지는 진독수(1879~1942)는 시사 잡지 ‘매주평론(每周評論)’ 14호(1919년 3월 23일)에서 3·1운동에 대한 감상을 밝히며 중국인의 궐기를 이렇게 촉구했다.

3·1운동 당시 중국 유력 매체들이 한국인의 거족적 독립운동과 단호한 독립의지를 상세히 보도했고, 이는 5·4운동 발발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학계는 분석한다. 강수옥 중국 연변대 교수는 논문 ‘근대 중국인의 한국 3·1운동에 대한 인식과 5·4운동’(‘한국근현대사연구’ 79집)에서 이를 조명했다.

논문에 따르면 베이징, 상하이, 톈진의 유력 언론 ‘신보(晨報)’ ‘민국일보(民國日報)’ ‘시사신보(時事新報)’ ‘동방잡지(東方雜誌)’ ‘신청년(新靑年)’ ‘신조(新潮)’ 등이 모두 3·1운동을 전격 보도했다. 상하이에서는 ‘신보(申報)’가 가장 먼저 3·1운동 소식을 전했고, 톈진에서 창간돼 중국 각지에서 발행된 대공보(大公報)도 3월 6일부터 4월 초까지 ‘조선독립활동 더욱 불타오르다’ 등의 연속 기사를 게재했다. 강 교수는 “중국 각지 매체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전면적, 심층적 보도를 이어갔다”며 “3·1운동의 평화적인 운동 방법과 일제의 잔혹한 진압, 한국인의 두려움 없는 혁명 정신을 자세히 다뤘다”고 밝혔다.

특히 중국인이 3·1운동에서 교훈을 얻어 한국과 같은 민족해방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호소가 이어졌다. 진독수는 ‘매주평론’에 쓴 논설 ‘조선독립운동의 감상’에서 “조선민족운동의 광영을 통해 우리 중국민족의 치욕을 다시 맛보았다.…일반 국민은 명료하고 정확한 의식적 활동을 한 적이 없다…중국인을 조선인과 비교하면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다”고 썼다. 1919년 4월 3일 ‘민국일보’도 ‘조선독립에 대한 동정(同情)에서 “본래 조선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만주에도 변고가 생긴다.…결국 조선의 독립은 배일(排日) 문제가 아니고, 생존문제이다. 또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고, 동아시아 및 전 세계의 문제”라고 했다.

강 교수는 3·1운동이 중국 각계를 놀라게 해 5·4운동의 성숙, 발생, 진전에 매우 큰 영향을 줬다고 분석했다. 그는 3·1운동이 △중국인의 반제반봉건 투쟁의식의 새로운 각성을 촉진했고 △반제구국 운동의 모델이 됐으며 △피압박민족 해방의 조류가 도달했음을 깨닫게 했다고 봤다.

해방 직후 동아일보는 3·1운동의 세계사적 의미를 “세계약소민족해방운동사에 자연히 빛나는 기록을 지었던 것”(1946년 2월 27일 ’3·1운동의 회상‘), “세계에서 비폭력주의의 원조”(1946년 3월 1일)라고 평가했다.

최근에는 3·1운동이 5·4운동이라는 하나의 사건 뿐 아니라 중국의 ’네이션 빌딩‘(nation-building)에 참조 대상이 되며 지속적인 영향을 줬다는 연구도 나왔다. 리궁중(李恭忠) 중국 난징대 교수는 지난해 11월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3·1운동은 중국 독립국가 개념 형성에 중요한 촉매였다”고 밝혔다.

리 교수는 3·1운동 이후 약 30년간의 각종 자료를 검토했다. 그는 중국 정부가 3·1운동과 한국 독립운동을 통해 일제에 맞선 중국인의 민족해방의식을 환기했다고 봤다. 3·1운동이 중일전쟁을 견디게 해준 긍정적인 본보기가 됐다는 것이다. 3·1운동 소재의 연극 ’산하루(山下淚)‘ 등이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리 교수는 “3·1운동은 5·4운동의 본보기와 전주곡이 됐을 뿐 아니라 20세기 전반까지 중국인이 국가형성을 탐색하는 데 지속적인 영향을 줬다”고 평가했다.

역으로 일제강점기 한국에서는 5·4운동을 조선의 독립과 연결지어 조명했다. 동아일보는 1925년 3월 2일 1면 사설 ’중국5·4운동‘에서 “기미년 우리 3·1운동에 곧이어 일어난 모든 민족운동 중에는 중국의 5·4운동도 그 하나”라며 “일본은…중국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하며, 기타 모든 동아(東亞)에 있는 중국과 유사한 식민지국가의 독립을 조성하야”라고 썼다.

또 “중국 국민운동의 구체적 전개의 제1보를 지은 5·4운동이 일어난 것도…우리의 3·1운동이 있은 것도 모두 1919년이 생산한 역사적 장면”(1927년 12월 16일 칼럼)이라며 피압박민족 해방운동의 연계 차원에서 5·4운동에 주목했다. 한국과 중국에서 3·1운동과 5·4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시달리는 양국 민중의 단결과 연대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측면에서 기억됐던 것이다.

베이징=윤완준 특파원 zeitung@donga.com
조종엽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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