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기정]“2018년 한국 극복”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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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초임 110만 원 배경은 제조업 쇠퇴
최저임금 올려도 제조업 없인 못 버텨

고기정 경제부장
고기정 경제부장
2015년 말, 우리의 대선에 해당하는 대만 총통 선거를 한 달여 앞두고 타이베이를 방문했을 때다. 대만 제3당인 친민당 선거사무실의 공약 벽보에 한국이 눈에 띄어 의외였다. “2018년 한국 극복!” 랴오창쑹 부비서장은 “경제력에서 한국을 이기겠다는 뜻”이라고 했다.

대만은 원래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였다. 2000년대 들어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서 한국에 역전됐다. 국가 전체 실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 규모는 한국의 3분의 1 수준이다. 대만 물가가 낮아서 구매력을 감안한 소득은 5만 달러 이상이라는 말도 있지만, 글로벌 경쟁에서 국내 구매력은 큰 의미가 없다.

대만이 한때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불린 건 제조업 경쟁력 때문이었다. 우리 학계에서 모범사례로 들곤 했던 중소기업 경쟁력 말이다. 지금은 대만 중소기업을 말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대만 제조업의 부침은 중국의 성장과 궤를 같이했다. 대만은 1990년대 대외 투자의 80%를 중국에 쏟아부을 정도로 본토 진출에 열을 올렸다. 홍색공급망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자본재 부품 생산벨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1980년대 50%에 육박했던 대만 산업 내 제조업 비중이 지금 30%에 불과한 걸 보면 당시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 기업들이 커가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중국에 들어간 대만 기업들은 처음엔 본토 기업들의 저가 공세에 시달리다 차츰 품질과 기술, 규모에서도 밀렸다. 경쟁에서 도태되는 기업들이 쏟아졌지만 ‘뒷배’가 없었다. 대만으로 돌아가자니 산업기반이 상당 부분 와해돼 있는 데다 본국 유턴 뒤 재기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중국 시장을 버리고 떠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대만은 제조업이 떠난 자리엔 만성적인 일자리 몸살만 남게 됨을 보여준다. 대만의 서울대인 대만국립대를 나와도 초임이 월 11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의 최저임금에도 못 미친다. 서비스업이 고용을 더 많이 창출한다고 하지만 상당수는 일용직, 임시직이다. 안정적인 일자리는 제조업이 제공한다. 2014년 대만 대학생들이 20일 넘게 입법원(한국의 국회) 점거 시위를 벌인 이유도 일자리 문제 때문이었다.

친민당의 ‘2018년 한국 극복’은 물론 성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만의 현재가 우리의 가까운 미래가 될 가능성은 적지 않아 보인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1분기 경제성장률을 업종별로 보면 제조업이 전 분기보다 2.4% 역성장했다. 10년 만의 최저치다. 사업을 접는 중소 제조업체가 많아 중고기계 유통업체들이 기계를 쌓아 놓을 곳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형편이다. 대기업들도 반도체처럼 극히 일부 산업을 빼고는 국내에 공장을 안 지은 지 오래다. 매달 나오는 실업률 통계에서 제조업 종사자가 뭉텅이로 빠지고 있다.

지금 각국이 벌이고 있는 제조업 경쟁은 일자리 쟁탈전이다. 미국에서는 2010년부터 7년 동안 2232개 해외 공장이 돌아와 일자리 34만 개를 만들었다. 일본도 2015년에만 700개 넘는 기업이 복귀했다. 우리도 2013년부터 유턴기업을 우대하고 있지만 눈에 띄는 실적은 없다.

현 정부는 제조업 정책으로 혁신성장을 내걸었다. 과거 정부의 창조경제가 그랬던 것처럼 손에 딱 잡히는 그림은 아니다. 제조업을 지키려면 산업구조 고도화니, 혁신이니 따지기 전에 사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과도한 임금인상 막아주고, 임대료 낮춰주고, 상속세 같은 세금 깎아줘서 당장은 원가를 줄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혁신을 강제하기엔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고, 외부 상황도 녹록지 않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반대로 가고 있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실업률#제조업#대만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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