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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발포로 3명 숨져… 분노한 군중 “왜 죽였나” 주재소 부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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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발포로 3명 숨져… 분노한 군중 “왜 죽였나” 주재소 부숴

안영배 논설위원 입력 2019-04-27 03:00수정 2019-04-27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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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53화> 경남 김해
경남 김해시(당시 김해군 김해읍)에서 거행된 3·1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한 모습. 1919년 4월 2일 의용대까지 조직한 김해읍 사람들의 만세운동에 놀란 일제 군경은 일본인 재향군인, 불량배들을 동원해 시위대 강제 진압에 나섰다. 김해근대역사위원회 제공
“만세 부른 백성들아/내 말 새로 들어보라/독립 만세 불러놓고/기정(사실을 속임)은 무슨 일인고/…같이 돈심(마음이 도타움) 못할진대 시작하지나 말았으면/불쌍한 백성들도 원혼이나 아니 되고/활달한 백성들은 고생이나 덜 것을/그중에 우리 시여(독립운동가 김승태의 자) 흥을 내어 즐기더니/가막(감옥) 고생 무궁하다.”

3·1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일경(日警)에 체포된 이들이 고문과 협박을 견디기 어려워하자 독립만세를 외치다 희생된 사람들이 원혼(冤魂)이 되지 않도록 끝까지 대의를 지켜 달라고 촉구하는 내용의 ‘내방가사’다. 이 기록은 경남 김해시 장유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감옥살이를 하던 김승태의 어머니 조순남(1860∼1938)이 지은 것이다.

‘김승태만세운동가’로도 불리는 이 내방가사에는 감옥에서도 일경에 굴하지 않는 아들을 대견해하면서도 몸을 상할까 애태우는 노모(당시 60세)의 절절한 심정이 담겨 있다.

○ 장유 유학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조순남의 내방가사에 기록된 장유 지역 만세운동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김해의 폭동’(1919년 4월 18일자)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할 정도로 시위 규모가 컸다. 당시 김해 일대에서는 세 지역(김해읍, 하계면 진영리, 장유면 유하리)에서 각각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그중 가장 격렬했고 피해가 컸던 곳이 장유 지역이다.


장유 만세운동은 경성의 고종 인산 행사에 참여한 유학자 김종훤이 독립선언서를 옷 보따리에 숨겨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시작된다.(삼일동지회, ‘부산 경남 삼일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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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의 만세운동에도 참여했던 김종훤은 고향인 장유면 유하리에서 김승태 이강석 김용주 조용우 조항래 최현호 등을 만나 경성의 상황을 전한 뒤 거사 준비에 착수한다. 이들은 4월 12일 장유면 무계리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한다.

거사 당일 정오경 각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무계리 장터 근처 대청천 언덕에 모여 주도자들의 선창에 맞춰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장터에 모인 군중 3000여 명은 북을 둥둥 치고 나팔을 불면서 일본군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당황한 일본 헌병이 무차별로 총을 쏘며 해산시키려 하자 이에 격분한 손명조 김선오 김용이 등이 주재소로 뛰어들었다.

세 사람은 결국 헌병의 총을 뺏으려다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한다. 성난 주민들과 가족들은 이들의 시신을 업은 채 “왜 죽였느냐”고 외치며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주재소를 부쉈다.

이후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김해분견소에서 파견된 일제 군경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잔인한 시위 진압에 나선다. 이때 일본 헌병의 총탄에 사망한 김선오의 차남 김예천은 자신의 가슴을 헤집으며 “나도 쏘라”고 대항하다 처참하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장유 만세운동은 김승태를 비롯한 주도자 10여 명이 헌병대로 끌려가고 나서 수그러들었다.

조순남의 내방가사에는 당시 끌려가는 아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우리 승태 왕자왕손 후예로서(가야국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해김씨)/충성을 위로 하여/왈소(크게 웃고)하고 기창(앞장서 부르짖음) 서니”라는 말로 독립만세운동을 지역사회 지도층이 당연히 앞장설 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장유기미독립의거 표지석’ 앞에 선 독립운동가 후손들. 표지석은 김해시 장유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열사 3명이 숨진 헌병주재소 터에 세워졌다. 왼쪽부터 김융일(장유 만세운동 김승태의 손자), 김형갑(광복회 경남지부장), 김광호(진영 만세운동 김정태의 손자), 배종태 씨(김해 독립운동가 배치문 지사의 양자). 김해=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실제로 김종훤 김승태 최현호 등 장유 만세운동 주도자 대부분은 지역 명문가 자손들로 일제의 탄압을 각오하고 있었다. 특히 김승태는 스스로 잡혀온 이들의 대표를 자임했기에 더욱 모진 고초를 겪었다.(이홍숙, ‘장유의 만세운동과 조순남’)

○ 진영 청년들의 ‘의병 창의


장유 만세운동 12일 전인 3월 31일, 장유 무계리 장터에서 북서쪽으로 15km가량 떨어진 진영 장터에서도 만세운동이 진행됐다. 진영의 만세운동은 지역민들이 자발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인 경우여서 주목받고 있다.

당시 하계면 서기로 재직하던 20대 청년 김우현은 신문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펼쳐지는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거사를 결심한다. 김우현은 같은 마을의 또래인 김정태 김성도 김용환 등과 준비에 돌입했다. 이들은 거사 전날인 30일 밤부터 하계면 여래리 뒷산 죽림에서 대형 태극기와 소형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만세’라고 쓴 전단까지 제작했다. 외부의 지원이 없었기에 독립선언서를 구하지 못해 전단은 자체적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진영 장날이던 3월 31일 오후 1시, 인파가 모인 장터 한복판에 20대 청년들이 기습적으로 등장해 태극기를 나눠 주고 ‘독립만세’라고 쓴 전단을 뿌린 뒤 독립만세를 외쳤다. 장터에 모인 군중이 호응해 독립만세를 연호했지만 재빨리 출동한 일제 군경에 주도자들이 모두 검거됐다. 김해헌병분견소장이 적은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시위대 규모는 200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일본 헌병은 참가자를 200명으로 축소 보고했다.

진영에서의 저항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특히 4월 5일 진영 장날에 2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펼쳐진 만세운동은 10대 청년들이 주도해 눈길을 끈다. 당시 하계면 한문서당에 다니던 안기호 김종만 등 10대 학생들은 서당 학생 30여 명과 함께 하계고개 밑에서 ‘독립군대장 안기호’라고 쓴 큰 깃발과 태극기를 흔들며 진영시장으로 시위행진을 했다. 이는 의병 창의의 방식을 따른 것으로, 3·1만세운동이 항일 의병정신을 이어받았음을 대외적으로 알리려는 의도였다.

○ 김해의 여성 만세운동


진영의 만세시위와 같은 시기에 또 다른 독립만세운동이 김해군에서 진행됐다. 일본으로 쌀을 보내는 중요한 수탈 거점 항구였던 김해는 일제의 집중 감시 지역이어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이런 역경을 뚫고 만세운동의 불꽃을 지핀 이들은 여학생과 부녀자들이었다.

김해 최초의 만세의거 주도자는 당시 서울 정신여학교(현 정신여고)를 다니던 구명순이었다. 당시 20세의 꽃다운 나이였던 그는 학교 휴교령으로 고향인 김해로 돌아온 뒤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부녀자들을 상대로 만세운동에 나설 것을 독려한다. 이때 같은 마을 출신이자 세브란스의전 학생이던 배동석도 뜻을 같이했다. 3월 30일 밤 10시 배동석은 임학찬 배덕수 송세희 등과 함께 김해읍 중앙 거리에서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기습 시위에 놀란 일제 헌병대는 강경 진압에 나섰다. 가까스로 일제 헌병의 손길에서 벗어난 주도자들은 다시 4월 2일 김해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거사일 오후 4시 주도자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의용대까지 조직한 이들은 시위 주도자들을 똘똘 감싸 일제 군경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당황한 일제 군경은 일본 재향군인을 비롯하여 상인, 불량배까지 총동원해 진압에 나섰다. 이날 시위로 배동석 등 시위 주도자 6명이 검거되고, 일제는 형세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시장을 강제로 폐쇄했다.(1919년 4월 7일 경상남도장관 보고)

하지만 만세운동의 열기는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4월 16일 읍내에서 약 6km 떨어진 이동리에서 부녀자 50여 명이 동네 산에 올라 만세운동을 벌였다. 세 번째였던 이날 시위에서는 일제 보병 80연대 소속 군인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포해 4명이 중상을 입는 등 희생자가 발생했다.

김해읍 만세운동은 여학생으로 시작해서 부녀자들이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에도 굴하지 않는 조선 여성들의 투지 넘치는 기상과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보여준 역사로 평가된다.

김해, 진영, 장유의 3·1운동 발생지를 함께 찾아본 김해3·1독립운동기념사업회 김광호 회장은 “김해시는 지방 3·1독립운동의 다양한 만세운동 양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게 특징이다”라고 말했다.

이달 13일 김해시에선 3·1운동 관련 유족과 인사들이 함께하는 행사가 개최됐다. 장유만세운동으로 3명의 열사가 숨진 헌병주재소 터에 ‘장유기미독립의거 표지석’을 세우는 제막식이었다. 비문에는 당시 징역형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이 꼼꼼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행사에 참여한 허성곤 김해시장은 “표지석은 3·1운동의 주역이 김해의 평범한 민초들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며 “그 정신을 이어받은 김해의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 내방가사 ‘김승태만세운동가’ ▼

어머니 눈으로 본 그날의 현장, 만세운동 전모 취재하듯 생생히
기록문화재로서 가치 높아



김승태 지사의 어머니 조순남 여사가 부녀자의 시각으로 장유 만세운동을 생생하게 묘사한 내방가사.
어머니의 눈으로 장유지역 3·1만세운동의 전모를 기록한 ‘내방가사’가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자식소회가’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이 내방가사는 장유지역 만세운동 주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승태를 중심으로 3·1운동 상황을 묘사했다고 해서 ‘김승태만세운동가’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내방가사는 조선시대에 주로 양반가 부녀자들이 순한글로 지은 작품으로 규방가사 혹은 규중가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재 34쪽 분량으로 전해지는 내방가사 역시 당시 사용되던 한글 말체로 작성돼 책자로 제작됐다.

내방가사는 문학적 가치 못지않게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순남의 내방가사를 연구한 이홍숙 박사는 “경남 명문 함안 조씨 출신의 부녀자가 마치 취재기자처럼 현장에서 장유지역 만세운동의 전모를 다큐멘터리처럼 치밀하게 기술했다는 점에서 기록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이어 “현존하는 내방가사 중 3·1운동 현장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내방가사의 저자인 조순남은 일제 감시를 피하기 위해 책을 종질녀에게 맡겼다. 장유 만세운동의 상황들을 후손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조치였다. 조순남의 증손자인 김융일 씨(77)는 “할아버지(김승태)가 감옥에서 풀려 나온 뒤에도 일제는 끊임없이 우리 집안을 감시했다”며 “증조할머니(조순남)께서는 책 제목도 ‘자식소회가’로 위장해 후세에 전해질 수 있도록 했다”고 소개했다.

내방가사 원본은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 김승태 지사의 유족이 자료의 중요성을 고려해 2005년 3·1운동 기념식장에서 김해시에 기증했지만 김해시에서는 현재 찾을 수 없다. 시 관계자는 “시청 자료실과 시 문화원 수장고 등을 모두 뒤졌으나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만 유족들이 시에 기증하기 전 자료를 사진으로 촬영해둬 내용은 파악할 수 있다.

김해=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내방가사#김승태의 어머니 조순남#김승태만세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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