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구자룡]체포된 어산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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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반체제 물리학자 팡리즈는 1989년 톈안먼 사태 다음 날 아내와 함께 베이징 주중 미국대사관으로 들어가 13개월 만에 미국으로 망명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왕리쥔 충칭시 공안국장은 2012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쓰촨성 청두의 미국영사관까지 차를 몰고 들어갔지만 24시간 만에 중국 당국에 넘겨졌다. 외교 공관이 치외법권이어서 그곳으로 들어간 사람이 보호를 받는 것은 1961년과 1963년 체결된 ‘빈 협약’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관련국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1급 수배자’로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의 운명도 그렇다. 그는 영국 런던 주재 에콰도르대사관 망명 생활 7년 만에 11일 영국 경찰에 체포됐다. 미국에 쫓기던 어산지는 2012년 2월 반미 성향 에콰도르의 대사관에 들어갔고 시민권까지 받았다. 그런데 2017년 친미 성향의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대사관 안에서만 지내면서도 발코니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던 그였지만 감시를 받으면서 눈칫밥을 먹는 신세가 됐다. 11일 대사관에서 체포돼 나오는 어산지의 모습은 온통 백발에 수염도 하얗게 되어 47세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어산지처럼 미국의 ‘1급 수배자’로 쫓기는 에드워드 스노든은 어산지 체포 소식이 알려진 뒤 트위터에 “자유 언론의 어두운 순간”이라며 동병상련을 나타냈다. 미 국가안보국(NSA) 등 정보기관에서 일했던 스노든은 2013년 미국 내 통화감찰 기록과 NSA 기밀문서 등을 폭로한 뒤 러시아에 망명해 머물고 있다. 그도 한때는 모스크바 공항 환승구역에서 쫓겨날 운명이었으나 간신히 망명객 신세가 됐다. 스노든은 어산지를 보면서 ‘정치적 기후’가 바뀌면 자신도 어떤 운명을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어산지의 체포 소식이 전해진 뒤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법무장관이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선 때 위키리크스의 힐러리 클린턴 관련 이메일 폭로 이후 “위키리크스를 사랑한다”며 내심 어산지 효과를 즐겼던 트럼프다. 이라크전쟁에서 미군 헬기가 민간인을 살해하는 동영상 등 어산지가 폭로한 내용들은 공익적 폭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미 국방부 사이트를 해킹하는 등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한 것이다. 어산지가 미국에서 재판받으면 군사 기밀 유출 혐의 등으로 5년형을 받을 수 있다. 살아 있는 권력이나 권력 국가와 맞서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지를 백발의 어산지가 새삼 보여준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줄리안 어산지#위키리크스#도널드 트럼프#에드워드 스노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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