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four)에버육아]〈28〉낙태, 엄마와 태아 모두에게 더이상 지옥이 아니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2일 20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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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지옥이 이런 거구나(싶었다).”

몇 달 전 친한 지인이 임신 수개월 차에 불법 낙태 수술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싱글’이었던 것도, 아이를 키울 여력이 안 된 것도 아니었다. 뱃속 아기의 건강에 큰 문제가 있었다. 어렵게 가진 아기였지만 출산 후 생존확률이 희박했기에 떠나보내야만 했다. 지인은 직접 발품을 팔며 자신의 아이를 ‘죽여줄’ 병원을 찾아다녔다. 그야말로 생지옥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취재하며 만난 한 여성 중에도 비슷한 이유로 낙태 수술을 받은 이가 있었다. 그녀의 아기는 초음파 결과 심장과 방광에 구조적 문제가 있어서 태어난 뒤 곧장 대수술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생존확률은 절반이었고, 만약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다 해도 아이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위 두 경우 모두 현행법상 합법적 낙태는 불가하다. 결국 두 여성 다 불법을 묵과해준다는 병원을 직접 수소문해 값비싼 비용을 내고 수술을 받았다. 당연히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장도, 보호도 기대할 수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결정이 났을 때 제일 먼저 그들이 떠올랐다. 지난 수십 년간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스스로를 위험으로 내몰아야 했을까.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란 말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낙태란 여성이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것,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내 지인들처럼 절박하거나 피치 못할 상황에서 ‘선택 아닌 선택’을 한다. 그저 육아가 싫어서, 한때의 ‘불장난’을 처리하러 가볍게 낙태수술을 하는 사람은 외려 극소수일 것이다.

수술 자체도 만만한 것이 아니다. 후유증을 동반할 수 있고, 불법수술일 경우 가이드라인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그 피해가 더 클 수 있다. 미국 등 낙태를 널리 허용한 국가에선 이미 낙태 후유증을 다룬 연구가 많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 (불법)낙태를 경험한 지인에 따르면 “낙태나 출산이나 몸이 느끼는 부담은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 입장에서 낙태가 결코 손쉬운 선택이나 해결책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많은 여성들이 낙태를 합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그만큼 출산과 육아가 그들에게 힘든 상황이란 방증일 것이다.

하지만 낙태가 태아에 대한 일종의 ‘살인’이란 사실도 부인할 순 없다. 생명권이란 가장 근본적이고 소중한 가치다. 난 아직도 고등학교 성교육 시간에 본 낙태 영상의 끔찍함을 (무려 20년간!) 잊을 수 없다. 작은 생명이 자궁 안에 들어온 기계를 피해 발버둥치다가 결국 최후를 맞이하는 충격적인 영상이었다. 이런 것까지 보지 않더라도 산전검사에서 작지만 힘차게 박동하는 아기 심장을 보면 ‘태아는 생명체가 아니다’라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런 측면에서 그동안 낙태죄가 일부 부모에겐 아이를 지키는 방패막이 되어주었단 주장도 있다. 아이를 낳고 싶지만 주변의 반대가 심한 경우다. 실제 나도 자주 가는 맘(mom) 카페에서 ‘남편과 친정엄마가 모두 출산을 말렸지만 다행히 (법적으로) 중절이 가능한 몇 주째를 지나서 아이를 계속 품을 수 있었다’는 내용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렇게 필요와 가치가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에 낙태 허용범위는 어려운 쟁점이다. 개정 과정에서 면밀한 고찰과 의견 수렴이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의 신체 및 장기를 정밀검사하려면 시기적으로 임신 5개월 정도는 돼야 한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태아가 스스로 느끼고 움직이는 단계에 도달하기 때문에 단일생명, 인격체에 가까워진다. 해외연구에 따르면 21주 된 태아는 곧바로 출산해도 열에 한둘 생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밖에 여러 논란거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난 이번 헌재의 결정을 환영한다. 개정논의를 통해 음지에서 행해지던 수많은 낙태를 일부나마 양지로 끌어올릴 수 있을 거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실상 낙태는 국가로부터 방조·방기돼왔다. 불가피한 수요가 분명 존재하는데도 처벌조항만 있을 뿐 적극적인 단속은 없었다. 그 덕에 국가의 관리망을 벗어난 낙태 수술이 만연하면서 여성과 태아의 건강권만 더 위협받게 됐다. 어차피 수술을 해야 한다면 합법의 범주 안에 두고 안전하게라도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외려 그를 통해 무분별한 낙태가 줄어들지도 모르고.

위헌 선고가 내려진 날 학교를 다녀온 첫째가 뜬금없이 “엄마, 나는 나중에 절대로 낙태하지 않을 거야”라고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서 낙태죄와 판결에 대해 설명해주신 모양이었다. 내가 “응, 하지만 낙태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 하니 “왜? 아기를 낳아서 우리처럼 다 키우면 되잖아”라고 했다.

사실 딸의 말처럼 낙태를 하지 않고 잘 키울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제일 좋을 것이다. 내 지인의 사례와 같이 답이 없는 경우도 있지만 사회·경제적인 어려움은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모나 미혼부모들에 대한 육아지원, 장애아들의 복지향상, 사전 성교육 강화 같은 것들이다. 사실 이런 것들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무조건 낙태하지 말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책임지지도 못할 아이를 낳는 건 엄마에게나 아이에게나, 그리고 그 사회에나 모두 큰 불행이다.

내년 12월 31일 어떤 결론이 나있을진 모르지만 앞서 헌법소원을 통해 폐지된 호주제, 간음죄처럼 모두가 진보라 평가할 수 있는 결과이길 바란다. 모체와 태아가 대립해야 하는 불행한 상황도 해소되어 있기를….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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