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재영]현금부자에게만 기회… 부동산 사다리 걷어차기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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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산업2부 차장
김재영 산업2부 차장
요즘 청약시장에선 본편보다 속편이 더 뜨겁다. 1·2순위에서 미계약, 당첨 취소 등으로 나온 잔여 물량, 이른바 ‘무순위’ 청약이다. 청약통장이 필요 없고 집을 갖고 있어도 상관없다. 2월 대구의 한 아파트에선 잔여 물량 44채 모집에 2만6000여 명이 몰렸다. 최근엔 1순위 청약 접수에 앞서 무순위 예약부터 받는 ‘사전 무순위’ 청약까지 나왔다. 당첨 후 계약을 하지 않거나 부적격으로 당첨이 취소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어렵게 당첨됐는데 왜 계약을 포기할까. 다시 보니 분양가가 너무 비싸단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분양가가 지금보다 더 낮아진다고 해도 실수요자들이 선뜻 청약에 나서긴 어려운 구조다. 당장 확보할 수 있는 실탄이 부족해서다.

예전엔 계약금 10%만 갖고 있으면 됐다. 중도금 60%는 집단대출을 받고, 잔금 30%는 살고 있는 집 전세보증금으로 나중에 치를 수 있었다. 이젠 계약금은 물론 중도금도 현금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분양가 9억 원 이상이면 중도금 대출 자체가 안 된다.

비싼 집은 실수요자의 몫이 아니라 그렇다 치자. 9억 원 아래라도 서울 등 투기과열지구에선 중도금 대출을 40%까지만 받을 수 있다. 나머지 20%는 미리 준비해 놓거나 더 높은 이자를 물고 신용대출을 받아야 한다.

계약금도 요즘엔 20%를 받는 경우가 많다. 대출 규제로 자금줄이 막힌 건설사들이 초기 자금을 확보하려 계약금을 올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울에서 분양가 6억 원의 아파트에 청약하려면 계약금에 중도금 일부까지 2억4000만 원은 들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여기에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까지 따지면 대출 한도가 더 줄어들어 필요자금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

당첨자 10명 중 1명은 ‘부적격’으로 취소 통보를 받는다. 무주택 기간이나 청약가점을 잘못 계산한 경우가 많다. 잘 좀 확인들 하시지. 국토교통부 홈페이지에서 ‘주택청약 및 주택공급제도 관련 자주 묻는 질문(FAQ)’을 내려받아봤다. ‘부적격자’들을 탓한 것이 미안해졌다. 분량만 총 154쪽, ‘자주 묻는’ 질문이라는데 222개나 된다. 집값을 잡기 위해 청약제도를 수시로 개편하다 보니 숫제 난수표가 된 것이다.

청약을 포기한 사람들, 부적격으로 기회를 날린 사람들의 물량은 무순위 현금부자들이 쓸어간다. 실탄이 충분하니 대출도 필요 없다. 소득기준이나 보유주택 수, 청약가점 등을 따지지 않아도 된다. 주워 담는다는 뜻의 ‘줍줍’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금수저 청약’이란 말도 나온다. 올해 초 분양한 서울의 한 아파트는 예비당첨자 500여 명 중 80%가량이 20, 30대였다. 분양가가 10억 원이 넘어 중도금 대출도 되지 않는데, 우리 사회에 자수성가한 젊은이들이 그렇게 많다고 보긴 어렵다.

투기 억제를 위한 대출 규제는 필요하지만 내 집을 마련하려는 무주택자와 집을 옮겨 가려는 1주택자들의 꿈을 꺾어서는 안 된다. 자금줄이 막힌 실수요자들의 대출 규제를 풀어 숨통을 터줘야 한다. ‘이 나이에 또 전세살이를 하고 싶진 않다’ ‘노모를 모실 수 있는 넓은 아파트가 필요하다’는 소박한 꿈을 꾸는 사람들은 청와대 담장 밖에도 많다.

김재영 산업2부 차장 redfoot@donga.com
#무순위 청약#현금부자#청약 부적격자#대출 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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