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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붉은 피로 대한의 신정부 도울 것”… 죽음 이긴 독립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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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붉은 피로 대한의 신정부 도울 것”… 죽음 이긴 독립열망

익산=정승호 기자 입력 2019-03-30 03:00수정 2019-03-3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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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48화> 전북 익산
익산4·4만세운동기념사업회는 매년 4월 4일 만세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고 청소년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익산 남부시장 4·4만세운동기념공원에서 기념식과 재현행사를 열고 있다. 익산시 제공
‘군인들이 군중들에게 총을 쏘자 수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동시에 소방대원들이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곤봉과 갈고리로 사람들의 머리를 내리쳐 부상자가 속출했다. 한 일본 군인이 시위대를 이끌던 젊은이를 연행하려고 하자 그는 “나는 죄를 지은 게 없으니 갈 수 없다”고 버텼다. 군인이 다시 “그렇다면 여기서 당장 죽일 수도 있다”고 위협하자 그는 머리를 곧추세우고 가슴을 내밀면서 “죽일 테면 죽여라. 그러나 내 입에서 만세 소리만은 막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군인이 무자비하게 젊은이를 칼로 찌르니 그는 피를 쏟으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세 번 외친 뒤 젊은 삶을 마감했다. 이 일로 모두 여섯 명이 죽었는데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1919년 선교사 윌리엄 불(한국명 부위렴)이 ‘익산 4·4만세운동’의 현장을 지켜본 뒤 미국 남장로교 총회에 보낸 보고서(‘Some Incidents in the Independent Movement in Korea’)의 일부다. 그는 당시 전북 군산에서 사목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익산 4·4만세운동은 일제에 농지를 빼앗기고 소작으로 전락한 농민들의 분노가 분출된 대표적인 농민 저항운동이었다. 또 일제의 야만적인 만행을 국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됨으로써 항일독립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 농지 수탈의 상징 대교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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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의 옛 이름은 ‘솜리’다. 익산은 사방 십 리가 갈대로 뒤덮인 늪지로, 가을이면 만개한 갈대꽃들이 솜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솜리의 일본식 이름인 속 리(裡)자를 써서 ‘이리(裡里)’로도 불렸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호남지역 농산물 반출을 위해 군산항을 전진기지로 삼고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도로와 익산과 군산을 연결하는 철도를 잇달아 개설했다. 교통 요충지가 된 익산에는 자연스럽게 일본인 거주지가 조성됐고 상인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는 그 수가 급증해 300여 호에 1000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정착했다.

일본인들은 땅을 헐값에 사들여 수리시설을 만들고 농지로 개간한 뒤 ‘기업형 농장’을 설립했다. 당시 전북에는 일본인 농장 40여 곳이 있었는데 그중 절반이 익산에 밀집돼 있었다. 익산 남부시장(옛 솜리장터) 언덕에 위치한 대교농장은 논 면적만 1300ha에 달하는 대표적인 일본인 농장이었다.

농장주는 농민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턱없이 비싼 도조(賭租·논밭을 빌린 대가로 해마다 내는 벼)를 내도록 했다. 그 결과 농민들은 일본인에게 상대적인 박탈감과 함께 민족적인 울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를 감지한 대교농장주는 일본인 여관업자 등과 함께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해 경비를 강화하고 총독부를 움직여 일본인 수비대와 헌병대를 익산에 주둔하도록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농지 수탈을 자행하는 농장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커져갔고, 반일 감정은 폭발 직전이었다.

○ 달아오르는 독립만세 운동의 열기

1919년 3월 5일 전북 지역 최초로 군산 영명학교 학생들과 교인들이 만세를 불렀다. 이후 만세운동은 전북 전역으로 확산됐고, 4월에 접어들면서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전북 각지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일제는 군과 경찰 병력을 늘렸다. 특히 일본인이 많이 사는 익산에는 일본군 제4연대 소속 병력 1개 중대를 추가로 배치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익산에서 시위가 늦게 시작된 것도 이처럼 일제의 철저한 감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익산의 민족주의자들은 삼엄한 일제의 경계를 뚫고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첫 번째 거사는 천도교 쪽에서 도모했다. 3월 10일을 거사일로 잡았지만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이어 3월 16일 익산역 주변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으나 조기 진압되면서 운동의 열기를 확산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일제와 일본인들은 병력을 늘리고 자경단 조직을 강화했다. 그 결과 3월 익산에서는 시위다운 시위를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지고 있다는 정보에 익산에서도 대대적인 독립만세 운동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 핏빛 함성 울려 퍼진 솜리장터

이런 열기를 폭발시킨 도화선은 오산면 남전교회 신도들이었다. 그 중심에 남전교회가 운영하는 도남학교 교사였던 문용기와 남전교회 신자 김치옥, 박성엽이 있다. 특히 군산 선교부에 근무하고 있던 박성엽은 군산 만세시위 때 뿌려진 독립선언서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다른 교인들과 함께 4월 4일(음력 3월 4일) 익산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선언서를 제작했다. 또 시위대를 3대(隊)로 나눠 1대는 익산역, 2대는 장터, 3대는 동익산역에서 각각 출발해 당시 일제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대교농장에 모이도록 했다.

익산4·4만세운동의 진원지인 남전교회. 1897년 익산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남전교회는 2000년 한국기독교장로회로부터 ‘총회 유적 제1호 교회’로 지정됐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거사일이 밝자 아침부터 남전교회 주변은 사람들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하얀 한복으로 차려입은 교인 150여 명이 교회 안마당에 모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한 뭉치씩 받아든 뒤 여자들은 허리춤에, 남자들은 바짓가랑이 속에 숨기고 장터로 향했다.

정오 무렵 장터 네거리에 ‘조선독립만세’라고 빨갛게 쓴 대형 깃발이 휘날리자 문용기가 1000여 명의 군중 앞에 나섰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전국 각지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만세운동의 의미와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어 김치옥이 품고 있던 ‘조선독립선언서’를 꺼내 큰 소리로 낭독했다. 낭독이 끝나자 시위대는 하늘을 찌를 듯한 우렁찬 함성과 함께 시장 골목길을 따라 대교농장을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시위대에 놀란 대교농장 자경단과 일제 헌병들은 창검과 총, 곤봉, 갈고리 등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 시도였지만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위기감을 느낀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에 군중들이 잠시 동요하자 문용기가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면서 앞으로 나섰다.

일제 헌병은 대검으로 태극기를 들고 있던 그의 오른팔을 내리쳤고, 큰 상처를 입은 손에서 태극기가 떨어져 나갔다. 문용기가 다시 왼손으로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주워 흔들려고 하자 헌병은 대검으로 왼팔마저 베었다. 양팔에 큰 부상을 입었지만 문용기는 굴하지 않고 버티면서 “조선독립만세”를 큰 소리로 외쳤다. 흥분한 일제 헌병들이 다시 몸통을 찔러대기 시작했지만 문용기는 물러서지 않은 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소”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긴 뒤 현장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 한말 의병운동 맥을 이은 항거

이날 시위에선 문용기를 비롯해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등 시위를 주도했던 남전교회 교인과 시위대를 따르던 서공유 이충규 등 6명이 유명을 달리했고, 2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 39명이 체포됐다.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명예교수는 “익산의 4·4만세운동은 일제의 정치 경제 사회적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의 성격이 강하다”며 “이런 점에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한말 의병운동과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현재 익산 시내에는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익산 시민들은 광복 이후인 1949년 4·4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남부시장에 순국열사비를 세웠다. 순국열사비 왼편에는 당시 현장에서 순국한 문용기 선생 동상이 2015년 건립됐다. 익산시는 이 일대를 4·4만세기념공원으로 조성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기념공원 뒤편 공터는 대교농장이 있던 자리다. 당시 대교농장 사무실로 쓰던 일본식 2층 가옥(등록문화재 제209호)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71년 동아일보사가 익산지역 유지들과 함께 익산역 광장에 세운 ‘3·1운동 기념비’. 익산=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오산면행정복지센터 앞에는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등 오산면 출신 애국지사를 기리는 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익산4·4만세운동의 진원지인 남전교회가 있다. 1897년 익산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남전교회는 2000년 한국기독교장로회로부터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총회 유적 제1호 교회’로 지정됐다. 익산역 광장에는 ‘3·1운동 기념비’가 있다. 1971년 8월 15일 동아일보사가 익산 지역 유지들로 구성된 건립협찬회와 함께 세운 것으로, 전국 1호 기념비다.


▼ 땅속 항아리에 ‘숨진 남편 피묻은 옷’ 보관… 광복뒤 펼쳐놓고 통곡 ▼

문용기 선생 뜻 지킨 부인 최정자 여사



1919년 일제의 칼에 숨진 독립운동가 문용기 선생(1878∼1919·애국장·사진)은 익산 4·4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다. 선생이 익산 만세시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데는 아내 최정자 여사(1887∼1955)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자리 잡고 있다.

아침에 나간 선생이 주검으로 돌아오자 그의 노모와 아홉 살 난 딸이 혼절해 그길로 세상을 떠났다. 네 살 난 딸도 병을 앓다가 그해에 죽어 최 여사는 한 해에 네 번의 초상을 치러야만 했다.

최 여사는 이처럼 황망한 상황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남편이 입었던 피 묻은 두루마기와 솜저고리를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었다. 언젠가 광복이 되면 일제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해줄 증거물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나중에 일본군이 찾아와 선생의 유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최 여사는 남편의 혈의(血衣)들이 탈색될 기미를 보이자 항아리에서 꺼내 자신의 한복치마로 싼 뒤 대들보에 정성스럽게 매달아 두기도 했다. 마침내 광복이 되자 최 여사는 비로소 피 묻은 두루마기와 솜저고리를 꺼내 마당에 깔린 멍석 위에 펼쳐 놓고 제를 올린 뒤 아들과 함께 대성통곡을 했다.

2009년 동아일보에 공개된 문용기 선생의 저고리. 왼쪽 가슴 부분에 일본 헌병의 칼에 찔려 생긴 구멍과 핏자국이 선명하다. 진품은 현재 독립기념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동아일보DB
이 혈의는 며느리 정귀례 씨가 1985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독립기념관은 이후 4년간 선생의 혈의를 전시하다 1989년부터 보존을 위해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현재 독립기념관 제3전시관(겨레의 함성)에서 볼 수 있는 혈의는 복제품이다. 일본 헌병의 대검에 찔려 생긴 저고리 왼쪽 옆구리 부분과 옷깃, 소매의 선혈 흔적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 상황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익산=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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