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여성 전문가 내쫓은 영국, IT 산업 몰락을 맞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16일 03시 00분


코멘트

◇계획된 불평등/마리 힉스 지음·권혜정 옮김/432쪽·2만2000원·이김

1970년 영국의 정보기술(IT) 기업 ICL에 재직하던 여성 직원이 퇴직 파티를 위해 천공 테이프로 치장한 모습. 당시 영국 사회는 여성이 결혼하면 회사를 떠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김 제공
1970년 영국의 정보기술(IT) 기업 ICL에 재직하던 여성 직원이 퇴직 파티를 위해 천공 테이프로 치장한 모습. 당시 영국 사회는 여성이 결혼하면 회사를 떠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김 제공
영국의 컴퓨터 하드웨어·소프트웨어 대기업 ICL의 1970년 8월 사보. 사내 각종 소식을 전하는 지면 한편에 ‘여성’란이 있다. 그 코너 속에는 천공 테이프를 두른 여성이 활짝 웃는 사진이 보인다. 앤 데이비스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결혼을 앞두고 동료들이 열어 준 ‘퇴직 파티’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당시 여성 직원들에게 결혼 후 퇴직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성 대부분에게는 발전 가능성이 없는 하급 일자리만 주어지는 상황에서, 결혼은 경제적으로도 여성에게 나은 선택이었다. 결국 결혼한 앤 데이비스는 활짝 웃는 사진만을 남긴 채 영국 정보기술(IT) 업계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저자는 이처럼 여성 인력을 배제한 영국의 보수적 관행이 20세기 컴퓨터 산업의 몰락 원인이라 지적한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무렵, 미국이 애니악(ANIAC)을 완성하기도 전에 콜로서스 컴퓨터를 만들어 작전에 활용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도 이 덕분이었다. 그런데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 에이다 바이런 러브레이스를 배출했지만, ‘구글’을 갖지 못한 나라”라는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의 추천사처럼 1974년을 기점으로 영국의 컴퓨터 산업은 멸종의 길을 걸었다.

여성 기술인의 배제가 산업의 멸종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책에 따르면, 사실상 영국 컴퓨터 산업의 발전은 여성 없이는 불가능했다. 2차대전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블레츨리 파크 암호해독 작전에도 여성 프로그래머들이 대거 투입됐다. 남성들이 군인으로 차출돼 부족한 노동력을 영국 정부는 여성을 동원해 해결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이다. 여성들은 남성보다도 뛰어난 성과를 보여줬지만 정부는 이들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고자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1950년대 여성공무원노동조합은 동일 임금 청원을 의회에 제출하는 운동을 벌인다. 그러자 재무부는 여성이 대부분인 직군을 남성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억지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성이 하는 일은 단순 노동에 불과하다는 논리였다.

지금도 역사는 남성만을 기억한다. 이를테면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남성 암호해독학자 앨런 튜링을 영웅으로 그리면서, 그와 함께 일했던 수많은 여성의 성과는 서사에서 생략했다. 분명한 건 앤 데이비스를 쫓아낸 ICL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IBM과의 경쟁에 밀려 몰락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뒤늦게 공개된 정부 문서와 인터뷰, 주요 컴퓨터 회사의 아카이브에 남은 기록물을 통해 숨겨진 역사를 꼼꼼히 파헤친다. 그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건, 성과 인종차별 없이 사람을 대하는 것이 단순한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수자는 약자라서 보호돼야 할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산업과 사회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구성원이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계획된 불평등#마리 힉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