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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연합시위대, 총칼 만행에 투석으로 맞서… 日軍, 무차별 발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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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연합시위대, 총칼 만행에 투석으로 맞서… 日軍, 무차별 발포

창원=성동기 기자 입력 2019-03-09 03:00수정 2019-03-09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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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42화>경남 마산-창원
삼진의거를 기획하고 준비했던 사당 성구사. 시위 주동자들은 일제 감시를 피해 이곳에서 태극기와 격문을 몰래 만들었다. 창원=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1919년 3월 3일 오전 경상남도 마산 두척산(지금의 무학산)에 인파가 모여들었다. 고종 국장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 가운데 마산지역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했던 독립운동가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인 김용환은 오전 11시 군중에게 궐기를 촉구하며 독립선언서를 뿌리다 현장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이처럼 창원·마산 지역은 서울의 3·1운동 이틀 뒤에 만세운동을 벌이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만세시위를 진행할 정도로 독립에 대한 열망이 뜨거운 곳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우선 당시 마산은 쌀의 대일 수출항이자 대륙 침략 준비를 위한 군수품 수입항으로 활용되는 곳이었다. 일제의 수탈 현장을 경험하고 목격하면서 민족적 반감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여기에 기독교계와 민족주의자들이 3·1운동을 주도한 인사들과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은 점도 영향을 미쳤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청년대표인 이갑성이 2월 23일 비밀리에 마산에 내려와 3·1운동의 진행상황을 전달하며 참여를 독려했다. 이갑성은 3월 1일 이른 아침 세브란스의전 학생 이용상에게 독립선언서 400여 장을 주고, 대구와 마산에 전달하도록 했다. 이용상은 1일 서울을 출발해 대구를 거쳐 2일 마산에 도착한 뒤 독립선언서를 나눠줬고, 이 중 일부가 김용환의 손에 쥐여졌다.

창원·마산 지역의 잇단 시위에 일제 군경은 폭압적 진압을 시도했지만 독립의 열기를 꺾지 못했다. 오히려 시위지역이 확대돼 농촌으로 이어졌고 규모도 커졌다. 그 정점에 4월 3일 창원군 진전·진북·진동면 3개면 주민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난 ‘삼진의거’가 있다. ‘진’으로 시작하는 3개 면에서 일어난 삼진의거는 수원 제암리사건, 평안도 선천읍의거, 황해도 수안의거 등과 함께 기미년의 대표적인 의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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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함까지 출동시킨 구마산 시위

3월 3일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김용환과 이형재 명도석 등 지도부는 일주일 뒤인 10일 추가시위를 논의하기 위해 비밀회합을 갖다가 전원 체포되고 만다. 이때 김용환이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고, 나머지는 하루 뒤 훈방된다. 김용환은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감옥에서 복역하다 심한 고문으로 얻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했다.

풀려난 이형재 등은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교사들과 만나 3월 21일 구마산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교사와 학생들은 학교등사판을 이용해 독립선언문 수천 장을 찍어냈다.

21일 날이 밝자 여성 보부상으로 변장한 김익렬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장터 인근 이발관에 몰래 숨겨둔다. 정오 마산발 삼랑진행 열차가 출발 기적을 울리자 이를 신호로 만세시위가 시작됐다. 당황한 일제 군경은 진해에 머물고 있던 전함 ‘조무호(朝霧號)’를 급히 마산항으로 오게 해 전투태세를 갖추게 했다.

이후에도 21일 시위로 투옥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시위가 26일과 31일 잇따라 열렸다. 특히 31일 시위 땐 3000여 명이 마산감옥을 겹겹이 에워싸고 만세를 외쳤다. 이때 한국인 간수 박광연이 제복을 벗어던지고 시위대에 합류했다. 이로 인해 그는 파직과 함께 자신이 일하던 마산감옥에 갇혀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 고현장터의 1차 삼진의거

일제의 탄압과 무단 통치를 상징하는 구(舊) 마산헌병분견대 건물. 창원=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시위 소식이 농촌지역에도 전달되자 즉각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곳이 창원의 진전·진북·진동면 일대다. 이들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연합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진동면 고현장터의 장날인 3월 28일을 1차 거사일로 정했다. 진전면 출신 변상태를 비롯해 권영조 권영대 권태용 변상헌 백승학 등이 주동이 됐다. 바닷가에 위치한 고현장터는 고성과 거제에서까지 장꾼들이 모여드는 큰 시장이었다.

변상태 등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진전면에 있는 사당 성구사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성구사는 나중에 삼진의거 발상지로 평가받아 ‘경상남도 기념물 제245호’로 지정됐다. 판각에 능한 권태선은 ‘왈아동포 유진무퇴(曰我同胞 有進無退·우리 동포는 나아감이 있으나 물러섬은 없다)’라는 문구를 목판에 새긴 뒤 격문 1000여 장을 찍어냈다.

거사일인 28일 오후 1시경 백승학이 시장 중앙의 연단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큰소리로 읽었다. 이어 권영대가 단상에 올라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군중의 만세소리가 장터에 울려 퍼졌다. 600여 명의 시위대는 시장을 몇 바퀴 돈 뒤 진동으로 향했다. 일제 군경은 무차별 진압에 나서 11명을 체포했다.

○ 양촌리 냇가에 집결한 시위대

고현장터 시위 때 체포되지 않은 변상태 등 지도부는 추가 시위를 더 크게 벌이기로 하고 음력 삼월 삼짇날인 4월 3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이들이 마을 지도자들을 찾아가 참여를 부탁하자 진전면 봉암리 이장 구수서는 “말할 것 뭐 있겠소. 집 볼 사람만 남겨두고 봉암리가 몽땅 나갈 것이오. 내가 앞장서서”라고 답했다.(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삼진독립운동사’)

3일 날이 밝자 이른 아침부터 집결 장소인 진전면 양촌리 냇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오전 9시경에는 그 수가 2000명을 넘어섰다. 시위대는 진북·진동면 시위대와 만나기로 한 진동을 향해 행진했다. 진동은 일본인 집단 거주지이자 헌병주재소가 있는 곳으로 양촌리에서 10km가량 떨어져 있었다.

시위대가 지나가는 마을마다 주민들이 행렬에 합류하면서 진동에서 2km 떨어진 진북면 지산교에 도착했을 때 시위대 수는 7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깜짝 놀란 일군(日軍)은 마산에 주둔 중인 중포병대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고, 헌병과 헌병보조원, 일본인 재향군인 등 30여 명을 소집해 진동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사동교에 배치했다.

그 사이 백승학이 이끈 진북면 시위대는 3, 4명씩 짝을 지어 삼월 삼짇날 나들이를 가장해 진동에 진입했다. 백승학은 정오 무렵 진동성터 뒤쪽에 집결한 진북면과 진동면 시위대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만세를 외쳤다. 이후 시위대 2000여 명이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을 휘젓고 다녔지만 일제 군경이 모두 사동교로 출동한 상태여서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았다. 진동의 일본인들은 만세 소리에 놀라 문을 걸어 잠그고 숨거나 마산으로 달아났다.



○ 피로 얼룩진 사동교


사동교를 건너려는 만세 시위대를 일본군이 총칼로 무력 진압하는 장면을 인형들로 재현한 것으로 애국지사사당 안에 있다. 창원=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마산시사’와 ‘삼진독립운동사’ 등에 따르면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던 진전·진북면 시위대 7000여 명은 사동교에서 일제 군경과 맞닥뜨렸다. 선두에 서서 큰 태극기를 흔들던 7척 거구의 장사 김수동이 가장 먼저 다리를 건넜다. 총칼로 무장한 일군이 가로막자 그는 “너희가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 국민의 정혈(精血)을 흡취(吸取)하니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讐)다”라고 호통치면서 한손으로 일군의 목덜미를 잡아 다리 아래로 내던졌다. 다리 아래로 떨어진 일군은 몸을 일으키면서 김수동에게 총을 발사했다. 가슴에 총을 맞은 김수동은 태극기를 잡은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숨을 거뒀다.

뒤따르던 변갑섭이 김수동이 쥐고 있던 태극기를 집어 앞으로 나가자 일제 군경은 태극기를 쥐고 있던 그의 오른쪽 어깨를 칼로 내리친다. 팔과 함께 태극기가 땅에 떨어지자 변갑섭은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집어 들고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일군은 왼팔마저 칼로 내리쳤고 두 팔을 모두 잃은 변갑섭은 분수처럼 피를 뿌린 뒤 숨졌다.

분노한 군중은 돌을 주워 투석전을 펼쳤고, 일제 군경은 무차별로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이때가 오후 3시경으로 피투성이가 된 시위대원들이 사동교 주변에 참혹하게 쓰러졌다. 사동교 충돌로 8명이 숨지고 22명이 부상했다.

‘삼진독립운동사’ 편찬을 주도한 권오윤 창원시 애국지사추모사업회 본부장은 “해산 직후 마산 중포병대대 지원 병력이 도착했는데 조금만 빨랐어도 사상자가 크게 늘어날 뻔했다”며 “몰래 치료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아 부상자 수도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았다”고 전했다.

현장에서 숨진 김수동 변갑섭 변상복 김영환 고묘주 이기봉 김호현 홍두익 등 8의사를 기리는 창의탑이 1963년 옛 사동교 근처에 세워졌고, 삼진의거가 시작된 양촌리 산자락에 8의사 묘역이 조성됐다. 창원시는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관 등을 건립하는 등 삼진의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 거사 하루 전 “독립 못하면 영원히 개-돼지 못 면해” 농민들에게 호소 ▼

삼진의거 기획-주도 ‘석당 변상태’
비밀결사단체 ‘대동청년단’ 단원, 경남 서부지역 시위주동 등 활약


일제를 놀라게 한 4·3 삼진의거를 기획하고 주도한 대표적인 인사는 진전면 양촌리 출신의 독립운동가 석당 변상태(1889∼1963·사진·건국훈장 애족장)다.

그는 거사 계획을 세우고, 사당 성구사에서 진행된 태극기 제작 작업을 지휘했다. 거사 하루 전인 4월 2일 양촌리 토지 개간장 연설에선 “우리가 독립하지 못하면 영원히 개·돼지의 처지를 면치 못할 것이고 이는 후손들에게 영원히 씻지 못할 후환을 끼치는 결과가 될 것”이라며 농민들에게 총궐기 참여를 호소했다. 거사일인 4월 3일 아침 양촌리 냇가에 집결한 2000여 명 앞에서도 “독립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야 한다”며 시위대를 이끌었다.

진전면 양촌리에 있는 ‘변상태 선생 기적비’. 삼진의거를 총지휘한 석당 변상태는 이후에도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다.
변상태는 16세 때인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엽총 5정을 구해 의병항쟁을 결심할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했다. 부산상업학교 3학년에 재학하다 한일강제병합 소식을 접한 1910년엔 학생 6명과 함께 부산 불락산에 올라 조국 광복에 동참하기로 피로 맹세하기도 했다. 1915년 부산에서 일본인이 자신의 과수원에서 오이를 훔친 우리나라 아동을 붙잡아 온몸에 콜타르를 칠한 사건이 일어나자 변상태는 노무자 200여 명을 동원해 그 일본인의 집을 때려 부쉈다.

‘마산시사’ 등에 따르면 1919년 3·1운동 당시 변상태는 비밀결사단체 ‘대동청년단’의 단원이었다. 3·1운동에 직접 참가했던 변상태는 경남 서부 지역에서 시위를 일으키라는 지령을 받고 귀향한 뒤 함안 창원 고성 등지에서 활약하던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하며 시위계획을 짰다.

변상태는 삼진의거 때에는 일제 군경에 잡히지 않았다. 시위대가 진동으로 향한 뒤 추가 거사를 위해 진양군 문산으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변상태는 이후 전남 송정리에서 의열단원 이종암(1922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 육군 대장 암살 기도)을 만나 3000원을 건네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벌이다 1922년 7월 체포돼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창원=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삼진 연합시위대#3·1운동#경남 마산#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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