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동정민]‘국기 마케팅’ 역풍 분 佛… 태극기의 본래 위상을 찾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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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민 파리 특파원
동정민 파리 특파원
지난달 19일 프랑스 의회에서 법안 하나가 논란이 됐다. 학교 교실마다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와 유럽연합(EU) 국기를 같이 달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이다. 우파 공화당의 에리크 치오티 의원이 발의했지만 중도 성향의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도 힘을 보탰다. 애국심과 국가 정체성을 강조해 ‘강한 프랑스’를 주창하겠다는 의도에서다.

과도한 국가주의를 경계하는 좌파 진영에서는 당연히 이에 반대하고 있다. 극좌 정당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의 미셸 라리브 의원은 “학교는 군대 막사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좌파 시민단체 학부모연합(CIPF) 대변인도 “국가 정체성 강화를 위해 국기를 부적처럼 쓰겠다는 거냐. 이해하기 어려운 조치”라고 동조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일부 우파도 이 법안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우파 시민단체인 학부모단체(PEEP)는 “옳은 방향이지만 미국처럼 국기를 걸어 놓고 애국심을 강조하는 건 프랑스 문화에 적합하지 않다”고 반대 의견을 냈다. 법안 표결 직전 M6 방송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이 법안에 대한 반대(53%)가 찬성(34%)보다 약 20%포인트 높았다.

프랑스혁명의 3대 정신인 자유(파랑) 평등(하양) 박애(빨강)를 뜻하는 프랑스 국기. ‘삼색기’로도 불리는 이 국기는 1789년 혁명 당시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할 때 국민군 총사령관 라파예트가 시민들에게 삼색 모자를 나눠주면서 유래한 것이다.

삼색기를 향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은 어마어마하다. 밤에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하면 삼색 불빛으로 꾸며진 공항 건물을 볼 수 있고 각 건물과 쇼핑몰에도 이를 마케팅 도구로 쓴 홍보물이 넘쳐난다. 빈센트 반 고흐,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조르주 쇠라 등 세계적 화가들도 자신의 대표작에 삼색기를 넣어 애정과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슬람 무장단체의 테러가 발생하면 파리의 상징 에펠탑에는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삼색 불빛이 반짝인다. 주요 서점에도 삼색기 관련 연구 서적이 즐비하다.

그런데도 왜 반대 여론이 높을까. 그만큼 정부의 국기 마케팅에 반감이 큰 탓이다. 지금도 프랑스인들이 넘치게 사랑하고 있는 삼색기를 굳이 ‘오버’해서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속내가 깔려 있다. 파리의 한 고등학교 교사 크리스틴 귀모네 씨는 “학생들이 벽에 걸린 국기를 본다고 애국심이 더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기보다 학생들에게 더 도움이 되는 자료를 벽에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3·1절 때 서울 주요 거리와 아파트 단지에 태극기가 많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원인이야 다양하겠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태극기가 일부 우익 시민단체를 뜻하는 고유명사가 되어 이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태극기를 걸지 않는다는 얘기도 들렸다.

일반적으로 우파가 좌파에 비해 국가 정체성을 강조하고 자국 국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긴 하지만 한국에서 지금 벌어지는 모습과 유사한 사례는 드물다. 지난해 11월부터 프랑스를 달구고 있는 대표적 반(反)정부 시위 ‘노란 조끼’에서도 삼색기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에서는 삼색기가 우파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2015년 11월 한 여론조사에서도 우파 시민의 97%와 좌파 시민의 88%가 모두 “삼색기를 사랑한다”고 답했다.

국기는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건 우리 인식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태극기가 분열의 상징처럼 변하는 것이 안타깝다. 태극기의 본래 위상을 찾아야 한다.
 
동정민 파리 특파원 ditto@donga.com
#태극기#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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