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레이건-고르비 ‘레이캬비크 회담의 실패’가 주는 교훈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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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 만나 서로 속내 확인… 1년뒤 ‘냉전 종식’ 이끌어내


제2차 북-미 정상회담 합의 결렬을 두고 미국 내에서 1986년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레이캬비크 회담’ 교훈을 떠올리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냉전 시기이던 1985∼1987년 2년간 미소 정상이 ‘첫 만남→입장차 확인→합의’라는 3단계 과정으로 역사적인 핵군축 합의인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체결했듯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비슷한 길을 밟으라는 것이다.

지난달 28일 회담 결렬 직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션 해니티 폭스뉴스 앵커는 “우리에겐 역사가 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이 (협상장을) 걸어 나갔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 잘 끝났다”며 레이캬비크 회담을 거론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어젯밤 나에게 ‘로켓 발사 및 핵실험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김 위원장과 그의 말을 믿는다”고 답했다.

같은 날 니컬러스 크리스토프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도 “레이건은 당시 소련이 주장한 군비통제 협정을 ‘결점(flaw)’으로 여겼다”며 “1년 후 소련이 더 나은 조건을 제시했고 거래가 성사됐다.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칼럼을 게재했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1985년 11월 중립국 스위스 제네바에서 처음 만났다. 냉전 후 미소 정상의 첫 회동이란 상징성이 컸지만 공통점은 거의 없었다. 74세의 노회한 정치인 레이건은 두 번째 임기의 첫해여서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20세나 어린 고르바초프는 취임 8개월의 ‘초짜’ 서기장으로 권력 기반이 빈약했다.

이 자리에서 협상의 기틀을 마련한 둘은 1년 후 북대서양의 외딴 나라 아이슬란드에서 다시 만났다. 둘은 이틀 내내 만났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소련은 ‘군축’, 미국은 스타워즈로 불리는 ‘전략방위구상(SDI)’에 집착했다. 특히 SDI를 실험실 연구로만 제한하라는 소련의 요구가 결정적 걸림돌이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막판까지 논쟁을 거듭한 두 정상은 서로 속내와 한계를 확인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핵 군축과 SDI 연계 전략을 포기하고, 레이건도 대소 강경 정책을 완화할 뜻을 굳혔다. 이에 1987년 12월 세 번째 만난 두 정상은 INF를 체결했다. 두 차례 회담의 실패가 ‘냉전 종식’이란 거대한 산을 등정하기 위한 베이스캠프였던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노이의 실패도 ‘전화위복’의 불씨를 남겼다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 직후 해니티 앵커와 가진 별도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이 변덕스럽고 간단치 않지만 매우 똑똑하고 날카롭다. 언젠가 무엇이 일어날 것이란 느낌을 갖고 있다”며 3차 회담에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북한 노동신문도 1일 “피치 못할 난관과 곡절에도 지혜와 인내를 발휘하여 함께 헤쳐 나가면 조미(북-미) 관계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나타냈다.

하정민 dew@donga.com·전채은 기자
#2차 북미정상회담#하노이 노딜#레이야비크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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