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영식]엘비스가 공자를 만난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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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국제부장
김영식 국제부장
지나고 보면 하지 않아서 아쉬운 일들이 있다.
지금은 대학생인 딸이 다섯 살 무렵이던 1999년 말 이정현의 노래 ‘와’가 최고의 히트곡이었다. 소형 마이크를 꽂은 새끼손가락을 입에 대고 노래하는 가수를 따라 춤추는 아이의 재롱을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걸 동영상으로 남기지 못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고 고가의 비디오카메라를 구입할 엄두가 나지도 않았다. 지금도 가끔 이렇게 얘기하지만, 이건 변명이다. 당시엔 딸이 평생토록 춤추고 노래하면서 즐거움을 줄 것이라고 착각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27, 28일 이틀간 베트남에서 진행된 제2차 북-미 정상회담도 한참 뒤에 많은 아쉬움을 남길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든다. 세계의 질서를 이끄는 국가의 수장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대국 지도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다시 만난 일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일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두 정상의 이번 만남에선 한반도 문제를 두고 과거의 전통 유지와 파격적인 관습 파괴라는 두 개의 흐름이 교차하는 상징성이 잘 드러났다.

김정은이 베트남까지 약 4500km를 66시간 동안 열차와 차량으로 이동한 것은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이 수상 시절이던 1958년 열차로 이동한 추억을 끄집어내려는 과거형 행보이다. 김정은이 핵무장이라는 과거 냉전시대의 접근법을 움켜쥔 것도 전통의 그늘을 보여준다. 반면 엘리트 언론과 주류사회의 외면을 받는 워싱턴 정가의 이단아 트럼프는 김정은을 친구라고 부르며 과거 비핵화 합의나 외교정책을 무시하는 관습 파괴자의 모습을 드러냈다. 베트남에 와서도 ‘러시아 스캔들’ 수사와 의회 청문회 때문에 코너에 몰려 트윗을 날리는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실무협상 대표를 봐도 그렇다. 북한 외무성 전략통으로 잔뼈가 굵은 김혁철과 달리 스티븐 비건 대표는 포드자동차 부사장 출신으로 전통적인 외교 협상가라고 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두 정상의 만남은 뭐랄까, 마치 엘비스가 공자를 만나면 벌어질 일과 유사할 것 같다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과거의 틀을 깬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가 공자를 만나 유교 교리를 따져가며 새로운 법도를 협상할 때 생길 법한 일들 말이다. 정확하게 대입할 순 없겠지만, 핵개발에 이어 대응 방안을 몰두해온 북한 지도자와 누구든 만나면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는 ‘거래의 달인’이 만나 서로 칭찬하던 모습은 기묘했다. 애초부터 ‘잘못된 만남’이었을까.

2차 북-미 정상회담은 처음부터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와는 거리가 멀었다. 트럼프가 서두르지 않겠다고 할 때부터 성과물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다만 완벽에 가깝다던 수많은 과거 합의문들도 이행되지 않아 무용지물 상태라는 걸 기억해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인지도 모르겠다.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 2005년 9·19공동성명 등 당대의 훌륭한 합의들도 무력화된 것을 보면, 완벽한 합의문보다 더 중요한 다른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 순간을 과거 관습과 전통을 깨는 출발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기회의 창이 열리는 시간은 언제나 짧다. 그러니 김 위원장도 판을 깨고 도발로 복귀하기보다는 기존 합의에서 이탈하지 말고 핵 폐기 의지가 진심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 훗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각설하고, 내 딸이 부모를 위해 춤추고 노래해 줄 것이라곤 이젠 털끝만큼도 기대하지 않는다.
 
김영식 국제부장 spear@donga.com
#북-미 정상회담#김정은#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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