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형은 목사 “3·1운동 당시 기독교 소수지만 큰 역할, 교세 커진 지금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28일 12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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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은 한국 기독교사(史)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교회는 일제의 거센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외국 선교사에 의해 전래된 기독교는 그 고난의 가시밭길 끝에 민족과 함께 하는 교회로 다시 태어났다.

21일 서울 성동구 성수일로 성락성결교회에서 지형은 목사(59)를 만났다. 독일 보쿰대에서 교회·교리사를 전공해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독일 통일의 현장을 지켜본 목회자로 대북지원과 교류에 힘써온 ‘남북나눔운동’ 이사장을 맡고 있다.

-100주년 3·1절을 맞는 소감은?

“3·1운동 당시 1800만 인구 중 기독교 신자는 20만 명 정도였다. 소수였지만 온 몸을 던져 민족과 사회를 끌고 갔는데 훨씬 교세가 커진 우리 교회가 그 역할을 하고 있나 의문이 들어 안타깝다.”

-기독교사에서 3·1운동의 의미는?

“기독교적 관점의 과대평가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팩트로 봐도 교회 역할은 컸다. 천도교 손병희, 불교의 만해 한용운 선생 같은 출중한 지도자도 계셨지만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조선에서 거의 유일한 전국적 네트워크인 교회가 3·1운동의 거점이 됐다. 불교와 유교의 토착화에 수백, 수천 년이 걸렸는데 기독교는 3·1운동을 계기로 30여년 만에 이 역사와 한 몸으로 직조됐다. 이 땅과 운명 공동체가 됐다.”

-반면, 신사참배는 교회의 큰 수치라는 평가다.

“3·1운동의 중심이 기독교였기 때문에 일제는 교회를 철저히 탄압했다. 1937년 본격화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교회의 대응은 크게 두 방향이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아 달라는 청원 운동과 순교하더라도 신사참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그냥 고개를 숙인 것만은 아니다. 대략 통계를 보면 200개 교회가 폐쇄됐고 2000여명이 투옥됐다.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순교자도 50여명에 이른다.”

-3·1운동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3·1운동을 계기로 왕국(王國)에서 민국(民國), 국민의 나라라는 의식이 생겨났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상상 이상으로 국제 관계에 밝았다. 당시 세계의 80%가 식민 지배를 받는 상태였기에 우리 지도자들은 동양 평화를 통한 세계의 평화를 애기한 것이다. 교회적 관점에서 보면 3·1운동을 계기로 고난을 견뎌내는 ‘결’이 생겨났다.”

-현재의 교회가 반성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까지는 먼 여정이다. 한국 교회가 이 상황을 꿰뚫어볼 수 있는 균형 잡힌 시각이 있는지 의문이다. 한동안 일부 교회의 통일 기도는 ‘38선이 무너지고 김일성 집단이 붕괴하시고~’라는 식의 북진 통일론이었다. 100년 전 국제관계 속에서 동양과 세계평화에 대한 지평을 가진 과거 지도자들보다 훨씬 떨어지는 의식 수준이다.”

-남북나눔운동 이사장으로 현재 진행 중인 대북 교류사업을 밝혀 달라.

“전임 이사장인 홍정길 목사님 등 선배들의 지론처럼 통일 문제는 진보와 보수가 함께 해야 한다. 그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다. 지난해 10월 58개 단체로 구성된 ‘북민협’을 통해 밀가루 5000톤을 보냈다. 그중 남북나눔이 320톤 정도를 부담했다. 특히 황해도 천덕리에서 진행 중인 농촌시범마을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800채 중 400채를 지었는데 천안함 사건이후 중단됐다. 북한이 평양과 일부 특구를 빼면 시골 지역을 개방한 전례가 없다. 단순히 주거환경 개선을 넘어 자립, 상생, 친환경의 표본이 될 수 있도록 북한 측과 협력하고 있다.”

-독일 유학 당시 통독 현장을 지켜봤다. 남북교류와 통일운동의 원칙이 있다면?

“사람이 만나야 한다, 절대로 성급하면 안 된다, 길게 봐야 한다, 이런 원칙들이 필요하다. 오랜 기간 사람이 만나고 교류한 독일에서조차 ‘오씨 베씨 (ossi wessi·동독 것들 서독 것들)’ 같은 불편한 말이 생기더라.”

-좀 더 구체적으로?

“경제력에서 앞서는 우리가 칼자루를 쥘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저쪽 얘기를 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통독 과정에서 크게 기여한 베를린 원탁회의를 주도한 크레첼 목사도 ‘동독 쪽 얘기를 많이 들지 않았다’라며 반성하더라. 기 싸움에서 밀리는 게 아니라 충분히 들어야 통일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김갑식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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