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영식]‘뭔가를 하지 않겠다’는 고르바초프의 결단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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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국제부장
김영식 국제부장
가끔은 ‘뭔가를 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위대한 공헌으로 이어질 때가 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권력을 잡은 1985년 3월. 소련 군산복합체 세력들은 미국의 ‘스타워즈’ 구상에 맞서는 독자적 스타워즈 구축 호소문을 그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레이저 무기를 우주에 올려두고 지상의 항공기나 미사일을 격추시키겠다는 구상이었다. 미국 미사일방어(MD)에 대응하기 위해 더 많은 미사일과 핵탄두를 만들겠다는 계획도 책상에 올라왔다. 미사일 1기당 10기의 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SS-18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량해 사거리를 줄이면 1기당 38기의 탄두를 탑재할 수 있다는 계산도 나왔다. 기술력이 미국에 미치지 못했다곤 하지만 이를 수용했다면 두 초강대국은 충돌로 치닫는 냉전의 궤적을 지속할 터였다.

이때 고르바초프는 소련판 스타워즈를 구축하지 않았다. 대규모 무기 경쟁도 하지 않았다.

군비 경쟁에 따른 경제 파탄을 더 이상 지속하지 않기 위해 ‘하지 말아야 될 일’을 명확히 한 것이다. 그런 뒤에야 가야 할 길, 해야 할 일이 명확히 보이는 법이다. 그 결과물이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이었다. 소련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법을 택한 급진개혁가는 핵무기가 없는 미래를 꿈꾸던 할리우드 출신의 몽상가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공포로 가득한 핵경쟁의 역사를 처음으로 바꿨다.

레이건은 대선 후보 시절인 1979년 7월 콜로라도주 샤이엔산에 있는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 본부를 방문한 뒤 핵무기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그는 1981년 3월 존 힝클리 2세의 총격을 받고 살아난 뒤 핵전쟁의 위협을 줄이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두 정상이 1985년 11월 19일 제네바에서 처음 악수했을 때 양국은 약 6000개의 핵탄두를 쌓아두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1986년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에서 모든 중·단거리 미사일을 제거하자고 제안했다. 결국 양국은 1987년 12월 8일 워싱턴 정상회담을 통해 INF에 서명했다. 사거리 500∼5500km인 중·단거리 탄도·순항 미사일의 생산, 실험, 배치를 중단했다. 이를 바탕으로 1991년 7월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는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에 서명하면서 미사일 2692기를 없애고 핵무기를 절반으로 줄였다. 고르바초프는 훗날 회고록에서 “SS-18 미사일 1기는 체르노빌 원전 100개에 해당한다”고 했다.

역사는 때론 퇴보하기도 한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1일 러시아의 조약 불이행을 이유로 탈퇴 선언을 하면서 냉전의 종말을 알렸던 INF는 기로에 섰다. 신뢰가 깨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정치적 동기에 따른 물밑 작업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군축이 모토이던 국제 안보질서에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INF에 6개월의 탈퇴 유예기간이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복귀할 뜻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조약 불이행 외에도 태평양에서 핵전력을 증강하는 중국에 대응하기 위한 지상발사용 중·단거리 미사일 체계의 개발 및 배치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일들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러시아의 신무기 개발 위협, 중국의 선제 핵사용 금지 원칙 폐기 등 군비 경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도 러시아 핵전력에 직접 대응해야 한다. INF 탈퇴 문제로 군비 경쟁의 기로에 선 지금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고르바초프의 ‘뭔가를 하지 않겠다’ 정신이 아닐까 싶다.
 
김영식 국제부장 spear@donga.com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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