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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식의 스포츠&]오늘 즐거웠니? vs 오늘 이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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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식의 스포츠&]오늘 즐거웠니? vs 오늘 이겼니?

안영식 스포츠 전문기자 입력 2019-02-07 03:00수정 2019-02-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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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왼쪽부터)이 (성)폭력 등 체육계 비리 근절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안영식 스포츠 전문기자
“저를 부러워하는 친구가 많아요. 축구클럽에 가입하고 싶은데 부모님이 ‘공부나 열심히 하라’며 허락을 안 하신대요. 운동하면 건강해져서 공부도 더 열심히 할 수 있는데, 그걸 모르시나 봐요.” 오산스포츠클럽 U-12 축구팀 순지호 군(수청초교 5)의 이 말은 우리나라 청소년 체육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체육의 가치와 효용성에 대한 스포츠 선진국들의 시각은 우리와 많이 다르다. 한 예로 영국은 학생들이 참가하는 각종 스포츠 이벤트마다 학부모 지침서를 배포한다. ‘본 대회는 승부와 관계없이 즐기는 스포츠를 모토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경기 직후 부모가 자녀에게 던지는 모범 질문도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승패 관련 질문은 절대 하지 않는다 △즐거웠니? △몸 상태는 어떠니? △친구들과의 협력 플레이는 어땠니? 등이다.

이와 관련해 심상보 대한체육회 스포츠클럽부장은 “영국의 학부모 지침서를 보고 난 후 우리의 현실을 되짚어보고 반성도 많이 했다. 우리나라 학부모나 지도자들은 경기 자체의 즐거움보다는 승패에 매몰돼 있다. 우리 아이들은 즐기는 운동이 아니라 이기는 운동을 강요받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일련의 체육계 미투 폭로로 선수들의 인권 유린 심각성이 또다시 만천하에 드러났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 여성가족부 등 3개 부처 장관은 합동 기자회견을 갖고 (성)폭력 등 체육계 비리 근절 대책을 발표했다. 특히 문체부는 메달 지상주의 타파, 엘리트 선수 육성 시스템 개선, 전문체육과 생활체육 균형 발전 등을 통해 ‘대한민국 스포츠의 패러다임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체육의 가치, 더 나아가 스포츠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공염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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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으로 기계가 인간의 근력을 대체했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공지능(AI)은 인간의 뇌를 대체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생명과 활력을 유지하기 위한 신체 움직임의 총량은 정해져 있단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순수 노동이 그 총량을 채웠지만 이후 활동량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미래사회에서는 스포츠가 그 총량을 채워줘야 한다. 움직이지 않으면 인간의 몸은 영화에 나오는 이티(E.T.)처럼 될 수도 있다. 스포츠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건강하고 즐거운 삶을 위한 필수요소다.

스포츠는 라이프 스킬(life skill)도 길러준다. 스포츠는 협동과 경쟁을 통해 승리의 성취감을 맛볼 수 있고, 패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생생한 학습현장이다.

강준호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스포츠는 자기 한계에 도전하는 과정을 통해 인생의 주요한 성공 요인인 GRIT(성장·Growth, 회복력·Resilience,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 끈기·Tenacity의 줄임말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집념’)를 키워준다. 또한 순간 판단력과 상황 대처능력, 상대에 따라 전략을 다양하게 구사하는 창의력도 함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은 스포츠 강국에서 스포츠 선진국으로 변모해야 한다. 모든 국민이 다양한 스포츠를 각자 수준에 맞게 즐기며 행복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정부가 스포츠에 대한 철학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스포츠를 단순히 기능적 영역이 아닌 국민의 삶의 질과 국가의 경제 활력을 높이는 주요 수단으로 인식해야 한다.

선수 육성방식은 정책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인권침해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학생 선수는 선수이기 이전에 학생이다. 그들이 올바른 교육을 통해 타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방법을 체득해야 (성)폭력의 대물림을 끊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스포츠계뿐만 아니라 교육계 시스템의 전면적인 대수술이 필요하다. 우리 청소년들을 ‘운동하는 기계’와 ‘공부하는 기계’로 이원화시키는 현행 입시제도의 개혁 없이는 스포츠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요원하다.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자크 로게(벨기에)는 정형외과 의사이고, 현 위원장인 토마스 바흐(독일)는 변호사다. 요트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3회 연속 출전한 로게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펜싱 금메달리스트인 바흐는 ‘공부하는 운동선수’였다.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할 정도의 경기력을 키울 수 있다는 방증이다. 우리나라는 언제쯤이나 로게, 바흐 같은 인물을 배출할 수 있을까.

안영식 스포츠 전문기자 ysahn@donga.com
#체육계 미투#대한체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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