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가장 천대받은 백정들, 호적 없어 병역-납세 의무도 없었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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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차별과 해방 과정

원로 만화가 이두호 씨(75)의 역사만화 ‘임꺽정’의 한 장면. 임꺽정은 1559년 전후로 강원도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한 조선 중기 ‘의적’으로 유명하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꿨던 그의 이야기는 소설 드라마 영화의 소재로 자주 쓰였다. 동아일보DB
원로 만화가 이두호 씨(75)의 역사만화 ‘임꺽정’의 한 장면. 임꺽정은 1559년 전후로 강원도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한 조선 중기 ‘의적’으로 유명하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꿨던 그의 이야기는 소설 드라마 영화의 소재로 자주 쓰였다. 동아일보DB
우리 역사에서 가장 천대받고 어렵게 살아온 사람은 ‘백정(白丁)’입니다. 백정은 특수주거지를 형성해 함께 살았습니다. 도살업, 수육판매업, 가죽제품 제조업, 버드나무 등의 초목으로 그릇을 만드는 유기 제조업 등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을(乙) 중의 을’로 살아간 그들의 삶과 신분 해방 과정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백정의 삶과 처우

백정은 주거지가 따로 떨어져 있고 직업마저 특수화됐기 때문에 점차 사회적인 위치와 대우도 일반인과 엄격히 구별됐습니다. 호적에 오르지 않아 백성 자격은 물론 병역과 납세의 의무도 없었습니다. 1900년을 전후한 시기 백정의 수는 약 40만 명 정도였습니다.

백정은 기와집 거주 금지, 명주옷과 갓의 착용 금지, 외출 시 봉두난발(뒤죽박죽 헝클어진 머리)에 패랭이 착용, 결혼할 때 말이나 가마 사용 금지 등이 적용됐습니다. 돌, 만석 등 천한 이름을 사용해야 했고, 일반 사람과 만날 때에는 항상 낮은 자세를 취해야 했습니다. 서당 등 교육기관 입학이 불가능했습니다.

백정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에 의해 신분이 해방되었습니다. 당시 백정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무어(Samuel F. Moore) 목사는 “백정은 머리에 갓을 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외출할 때 패랭이를 쓰고 다녔기 때문에 한눈에 신분이 드러났다”며 “그러나 갓을 쓸 수 있게 되자 백정 중에는 너무 좋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갓을 쓴 이도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 신분 해방의 한계와 형평운동의 전개

1928년에 제작된 조선형평사 전국대회 포스터. 깃발에 ‘형평’이란 글자가 써 있다. 동아일보DB
1928년에 제작된 조선형평사 전국대회 포스터. 깃발에 ‘형평’이란 글자가 써 있다. 동아일보DB
백정의 신분은 해방됐지만 사회·경제적 차별은 지속됐습니다. 백정은 1896년 호적법에 의해 호적에 등재됐습니다. 하지만 직업난에 ‘도한(짐승을 잡는 자)’ 혹은 붉은 점을 찍어 신분 표시를 남겼습니다.

더구나 정부는 백정이 독점했던 가축 도살을 금지했습니다. 도축업자는 1896년 이후부터 정부 허가를 받고 일정액의 세금을 납부해야 했습니다. 일반인도 도축업에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백정 중 일부는 도축업을 통해 부자가 됐지만, 대부분은 도축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일반 국민의 차별의식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백정은 서당이나 근대식 학교에 들어가 교육받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근대식 학교 입학을 금지한다는 조항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입학 자체가 어렵고 입학해도 교사와 친구의 차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강원 지역 근대식 학교에 입학했던 백정의 자식은 수백 명의 생도에게 매일 입에 담을 수 없는 학대와 모욕을 받았다고 합니다. 부유한 백정조차도 교육을 받기 어려워 백정의 교육 수준은 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차별은 백정들의 단체 ‘형평사’ 설립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진주 지역의 백정 이학찬은 자산가로 성장해 자식을 공·사립학교에 입학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백정이라는 구실로 입학을 거절당하고 허가를 받아도 차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한탄스러웠습니다. 이에 1923년 4월 25일 진주 지역의 백정 출신과 지식인 등 80여 명이 모여 형평사를 설립했습니다. 형평사는 1924년경 전국에 지사는 12개, 분사는 67개, 회원은 7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합니다.

형평사는 백정의 인권 향상과 모든 국민의 평등의식 향상을 위해 여러 활동을 했습니다. 1923년 4월 25일 마련된 형평사 세칙에 “야학과 강습소를 증설하고 신문 잡지의 구독을 권장하고 수시로 강연을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1925년 형평운동 전국대회에서는 “각도 지사에 야학 강습소를 설치하고 사원의 자식은 의무교육으로 한다”고 결의했습니다.

○ 반(反)형평운동과 ‘을’과 ‘을’의 전쟁

백정이 전국에 지사와 분사를 설립하고 인권·생존권 투쟁을 적극 전개하자 반형평운동도 전개됩니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지 형평운동 세력과 반형평운동 세력 간의 충돌에 대한 신문 기사가 44건에 달했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충돌이 1925년 경북 예천에서 발생했습니다. 백정은 신분해방 이후 직업적 차별을 피하기 위해 농업으로 전업을 시도했습니다. 반면 대부분의 농민은 백정의 마을 정착을 거부했고, 백정을 이방인으로 취급했습니다. 백정은 지역 내 형평사의 지사와 분사를 설립한 후, 형평사의 지원을 받으며 농업으로 전업을 시도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소작인과 머슴은 지주의 각종 수탈에 시달리고 있었고 생계가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백정마저 농업에 진출하려 하자 생계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1923년 8월 무렵 경북 예천 지역에도 형평사가 만들어졌고, 1925년 8월 9일 창립 2주년 기념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창립총회에 쳐들어가 사람들을 구타했고, 10일에는 예천 형평사를 습격했습니다.

이후 형평사 회원과 반형평세력이 자주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1926년 예천 사건을 보도한 신문 기사에 의하면 형평사를 습격한 인원이 많을 때는 500여 명에 이릅니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일제 경찰은 형평사 습격에 가담한 23인을 체포했습니다. 그중 12명이 징역과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재판 기록을 보면 피고인의 상당수가 머슴과 일용직 노동자였습니다. 이들은 백정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백정에 대한 차별의식과 더불어 삶에 대한 두려움마저 느꼈을 겁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도 ‘갑’과 ‘을’의 논쟁이 한창입니다. 어느 시대나 갑과 을이 존재합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갑’과 ‘을’의 싸움보다 ‘을’과 ‘을’의 싸움입니다. 형평운동 세력과 반형평운동 세력의 싸움은 ‘을’과 ‘을’의 싸움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을’과 ‘을’의 싸움에는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형평운동을 살펴보면서 우리 사회의 모습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
#백정#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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