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만세!” 100년 전 함성…부산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남달랐던 의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25일 17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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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신여학교에서는 이러한 서울 소식을 알고 거사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완료한 후 꽃 같은 젊은 여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손에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하늘 높이 외치니…님들의 독립만세는 부산·경남 지역의 선구가 되니 국사에 어찌 남녀의 구별이 있으랴.’

부산진일신여학교(이하 일신여학교)의 후신인 동래여고(부산 금정구 소재) 교정에 있는 기념비에 적힌 비문이다. 여기에 ‘이러한 서울 소식’은 3·1만세운동을 뜻한다.

서울 시내를 휩쓴 독립운동 열기는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에도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장거리 이동수단이 변변찮았던 100년 전, 부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다.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조선민족 자주독립 만세” 함성이 울려 퍼진 지 열흘 만인 3월 11일, 부산진에 위치한 일신여학교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부산·경남 지역 최초였다. 이후 동쪽으로 동래 구포 밀양 울산, 서쪽으로 김해 창원 함안 함양 합천 등으로 만세시위가 확산됐다. 일신여학교가 부산·경남 만세시위의 진원지였던 셈이다.

● 밑거름이 된 ‘여성교육의 힘’


100년 전 여성의 외부 활동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가장 먼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해답을 찾기 위해 21일 동구 좌천동에 있는 일신여학교 기념관을 찾았다. 부산 도시철도 1호선 좌천역 3번 출구를 나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니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이 나타났다. 1895년 호주장로교선교회 소속 여성 선교사들이 세운 일신여학교의 교사(校舍·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55호)로 오랫동안 사용됐던 곳이자 1919년 만세시위의 출발점이었다.

일신여학교를 세운 호주 선교사들은 ‘여성교육의 힘’을 믿었다. 고아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교육시키던 이들은 1895년 좌천동에 위치한 초가삼간에 3년제 소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집했다. 부산·경남 지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었다. 초대 교장이었던 멘지스(B. Menzies·한국명 민지사·閔之使·1856~1935)는 학교 설립 취지에 대해 “나라의 수준을 올리기 위해서는 부인들과 어머니들이 반드시 교육을 받아야 한다”라고 밝혔다.(동래학원 100년사) 학생들은 이곳에서 성경과 영어, 조선어 등을 포함한 근대 교육을 받으며 개화의식을 길렀고 남녀평등과 민주주의, 자주·자립정신도 익혔다.

일신여학교가 자리 잡은 부산진은 장로교파가 강했던 곳이다. 1909년 통감부문서에 따르면 일제 헌병대는 “배일(排日) 고취자는 신교 그중에서도 장로파에 많고 구교(천주교)는 배일의 언동이 적다”고 파악했다. 장로파가 세운 일신여학교 외국인 교사들은 물론 이들과 접촉하는 조선인들도 일제의 사찰대상이었다. 이 학교 외국인 교장과 선교사들은 연설 등을 통해 학생과 일반 조선인들에게 국력이 강한 미국이 일제의 조선 침탈을 막아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고, 교회와 그 부설학교가 보호막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오미일 부산대 교수, 논문 ‘일신여학교의 3·11 독립만세 시위와 여성운동’)

● 민족의식 일깨운 여교사들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와 동래학원 100년사 등에 따르면 만세시위 D데이는 3월 11일이었다. 앞서 같은 달 2일과 3일 서울에서 학생대표가 내려와 ‘경성학생단’ 이름으로 부산상업학교,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대표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궐기를 종용했다. 연락을 받은 일신여학교도 참여를 결의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연락책은 당시 고등과 3학년이었던 이명시가 맡았다. 3·1운동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경찰은 만세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엄중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주경애 교사는 학생들을 시켜 비밀리에 부산상업학교 학생들과 연락하게 하고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개시됐으니 우리 학교에서도 거행하자”고 동료 교사들을 설득했다. 이어 거사에 동참하기로 한 사실을 극비리에 고등과 학생들에게 알리고 태극기를 만들 것을 부탁했다.

3·11만세시위에 적극 참가했다 체포돼 징역 5개월을 선고받은 김반수(당시 16세·2001년 사망)는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생전에 이렇게 증언했다. “10일 밤 10시경 독립운동의 벅찬 감격에 가슴 두근거리며 주경애 선생의 기숙사 방에 모였다.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전기불을 끈 뒤 벽장 속에 들어가 이불로 창을 가리고 교대로 망을 보며 촛불을 밝혀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태극기를 만든 옷감은 (내) 혼수용으로 부모님일 마련했던 옥양목 한 필이었으나 부족해 마을 포목점에서 구입해 마련했다. 태극의 동그라미는 사발을 뒤집어 그리고, 깃대는 학교 대나무밭에서 구해 100여 개(일본 측 기록은 50개)의 태극기를 준비했다.”(동래학원 100년사)

당시 주경애와 박시연 교사는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학생들은 그런 선생님들을 잘 따랐다. 1917년 졸업 후 모교인 일신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한 박시연은 재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교무실에 걸린 일왕의 사진을 손으로 긁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만들었을 정도로 반일정신이 강했다.

두 교사에 앞서 일신여학교에는 평양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서매물이라는 여교사가 재직했는데 그는 항일 비밀여성단체 ‘송죽회’의 부산지역 조직책임자였다. 송죽회는 1913년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와 학생들로 구성된 항일 단체로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 활동을 주로 했다. 오미일 교수는 “서매물은 송죽회가 결성되기 이전부터 일신여학교에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며 “일신여학교의 반일적 분위기와 민족교육이 만세시위 운동의 자양분이 됐다”고 평가했다.

● 좌천동 큰길에 울려 퍼진 만세소리

3월 11일 졸업시험을 치르고 집에 돌아갔던 고등과 학생 11명은 저녁식사를 한 뒤 주경애 교사 방에 모여 태극기를 나눠 가졌다. 주경애·박시연 교사의 격려를 받은 학생들은 오후 9시경(오후 8시라는 기록도 있음) 교문을 나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좌천동 큰길로 내달렸다.

큰길에 집결한 학생들은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시위 참가 학생 이명시와 박정수를 인터뷰한 책 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에 따르면 데이비스 교장(Margaret Sandiman Davies·한국명 代瑪嘉禮·1887~1963)과 다른 호주인 교사도 나와 만세를 부르며 학생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학생 송명진은 훗날 데이비스 교장 등이 자신을 잡으러 오는 것이 더 겁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제 관헌 자료에도 데이비스 교장과 데이지 호킹이 만세시위 때 “부르시오. 만세를 부르시오”라고 소리 높이 외치면서 학생들을 지휘했고, 학생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곧이어 주민들이 호응하면서 시위대 수는 100명 이상(‘조국을 찾기까지’에는 300~400명의 군중으로 나온다)으로 불어났다. 이후 학생들은 큰길에서 범일동 방면으로 방향을 바꿔 행진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일제 군경은 총검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며 진압에 나섰다. 이에 학생들은 반대 방향인 초량 방면으로 도망가려 했으나 그쪽에서도 군경이 나타나 인근 민가로 들어가 숨어야만 했다. 김반수는 “일제 군경의 총검에 길바닥이 삽시간에 피로 적셔졌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당초 시위대의 계획은 부산상업학교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11일 새벽 기숙사 주변에 만세운동 촉구 전단이 뿌려졌다. 한 학생이 주워온 전단을 건네받은 주경애 교사는 “이 삐라(전단)는 중앙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라는 삐라이니 비밀을 지키고 있으라”며 “오늘 저녁 9시에 부산상업학교 학생들과 부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위 움직임을 탐지한 경찰과 부산상업학교가 11일 돌연 시험을 중지하고 임시휴업을 단행한 뒤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그 결과 총궐기는 무산되고 일신여학교 단독 만세시위만 진행됐다.

● 체포된 뒤에도 당당했던 여학생들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교사들과 학생들은 거사 당일 밤과 이튿날 체포돼 부산진 주재소(일제강점기 경찰의 말단기관)에서 고초를 겪었다. 이 때 체포된 이는 약 30여 명으로 일반 주민과 다른 학교 여학생 1명도 포함됐다. 호주인 교장과 교사는 구금 이틀 만에 석방됐지만 한인 교사와 학생들은 형을 살았다.

이후 일경은 주모자를 자백하라며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뺨을 때리거나 구두발로 차고, 옷을 벌거벗기기도 했다. 어린 여학생들에겐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주동 인물은 없으며 우리가 모두 주동 인물”이라고 맞섰다. 특히 고등과 4학년 김응수는 “세 살 먹은 아이도 제 밥을 빼앗으면 달라고 운다. 우리들이 우리나라를 돌려달라고 시위하는데 무엇이 나쁘냐”고 따져 물어 심문하는 일경을 아연케 했다. 김응수는 1971년 일신여학교 시위 참가자 좌담에서 “당시 일경이 자신을 기절하도록 때렸다”고 공개하기도 했다.

심문이 끝난 뒤 부산형무소 감방 3곳에 나뉘어 수감됐다. 주경애와 박시연 교사는 징역 1년 6개월을, 학생들은 징역 5개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들은 옥중에서 모시실을 무릎에 비벼 뽑는 강제노동으로 무릎이 벗겨져 피가 나는 등 혹독한 수형 생활을 겪었다.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의리도 남달랐다. 만세시위에 함께 모의하고 참가했던 임말이 교사와 그의 동생인 임망이 학생이 형부인 사까이 형사에게 모의사실 전모를 제보했고 기소 면제돼 석방됐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학생들을 이들을 쫓아내기 위해 10일 간 동맹휴학을 단행했고 결국 자매는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학생들이 먼저 석방됐으나 주경애·박시연 교사가 출소한 뒤 졸업식을 하기로 나머지 학생들이 결의했다. 결국 1920년 봄 8회 졸업식을 먼저 한 뒤 7회 졸업식은 교사들의 출소 뒤에 열렸다(동래학원 100년사).

부산=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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