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주한미군 흔드는 한미동맹 혐오자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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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논설실장
이기홍 논설실장
진통을 겪고 있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세 가지 점에서 다른 때보다 특히 더 어렵고, 세 가지 점에서 특히 더 중요하다.

어려운 이유 첫째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이번 협상을 일본 나토 등과의 협상에 기준으로 적용할 ‘표준 운영 절차(SOP·Standard Operation Procedure)’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한국에 밀리면 다른 나라에서 돈을 받아내기가 더 어려워진다고 보고 있다.

둘째, 분담금을 더 받아내려는 건 과거의 미국 대통령들도 다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들은 한미동맹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다르다. 일본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주일 기지와 오키나와 등에 막강한 공군력 해군력이 버티고 있는데 굳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한국에 대규모 지상군을 주둔시켜야하는 이유를 잘 납득하지 못한다. 그의 찌푸린 얼굴 앞에서 반론을 펴며 한미동맹의 가치를 설득할 ‘어른의 축(軸)’도 다 물러났다.

세 번째 이유는 한국의 집권세력이 반미·민족자주를 내세우는 좌파진영을 핵심 지지층으로 하고 있어 운신의 폭이 좁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번 협상이 특별히 더 중요한 첫째 이유는, 만약 결렬 상태가 계속되면 주한미군이 북-미 간 흥정 카드로 전락할 수 있는 시기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가 주한미군 철수를 김정은에게 선물로 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병력감축, 전략자산 전개 중단 등을 협상용으로 내놓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둘째, 김정은의 평화 공세·남북화해 무드와 한미 갈등이 결합하면서 한국 내에서 주한미군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이 밑바닥부터 금이 가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셋째, 미국 내에서도 회의감이 확산되고 트럼프의 후임 정권들도 주한미군 감축을 큰 방향으로 밀고 갈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번 분담금 협상을 둘러싼 환경 가운데 다행스러운 점도 두 가지 있다.

첫째, 미국의 세계 전략상 주한미군 병력을 빼내야 할 필요성이 크지 않은 국제 정세다. 2000년대 중반 테러와의 전쟁이 한창일 때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주한미군 철군·감축을 집요하게 추진했다. 한국, 독일에서 지상군을 빼낸 뒤 아프리카 중동 등 테러세력이 준동하는 지역들에 ‘수련의 잎(Lily Pad)’ 같은 거점을 두고 병력을 필요에 따라 신속히 배치하는 세계 재배치 전략(GPR·Global Posture Review)이었다.

다행스러운 두 번째 환경은 한국의 좌파가 아이로니컬하게도 트럼프에 대해 덜 적대적이어서 반미 시위가 상대적으로 덜 거센 시점이라는 점이다. 2017년 트럼프 방한 때 물병을 던지며 강렬히 규탄했던 좌파진영은 트럼프가 김정은과 대화에 나서자 태도가 바뀌었다. 정상적인 진보적 세계관을 가졌다면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보다 패권주의적이고, 자국 이기주의적이며, 소수자 인권을 경시하는 트럼프야말로 규탄 1순위여야 마땅한데, 의외로 잠잠하다. 이상과 가치가 아니라 다른 데 더 우선순위를 둔 이념집단임을 드러내는 사례다.

트럼프는 이번 협상이 결렬되면 주한미군 감축을 추진할 것이다. 주한미군 2만8500명 가운데 전투부대는 2사단 예하 5000명 규모 전투여단뿐인데 이 여단은 6~9개월 단위로 순환 배치된다. 올여름 본국에 귀환한 뒤 후속 부대를 안 보내면 자연스레 감축되고 주한미군은 지원부대만 남게 된다.

현재 미국은 마지노선으로 10억 달러, 한국은 1조 원 미만을 내걸고 있다. 이젠 양국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미국의 마지노선이 정 깨기 어렵다면 돈에선 좀 양보하되 그 대신 돈 이상의 것을 얻어내는 전략도 써볼 만하다. 예를 들어 한국이 도입을 원했지만 미국이 기술 유출을 이유로 거부해온 최첨단 감시·정찰 무기의 도입 약속을 받아내는 식이다. 주한미군 분담금은 인건비(40%)·군사건설비(40%)·군수지원비(20%) 등으로 구성돼 있어 90%는 다시 한국경제로 흡수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결국 가장 큰 걸림돌은 동맹을 경시하는 트럼프의 아집, 그리고 좌파그룹을 의식하는 한국 집권세력의 낡은 인식이다. 비록 1980년대 중반 국군을 ‘양키 용병’이라 규정했던 민족해방계열(NL) 출신이 포진해 있는 문재인 정권이지만 이젠 한미동맹을 지키기 위해 지지 세력을 넘어서는 용기를 내야 한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주한미군#한미동맹 혐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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