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왕조’의 조력자? KBO 신인지명제도의 변천과 에피소드

  • 스포츠동아
  • 입력 2019년 1월 25일 05시 30분


해태 타이거즈. 사진제공|KBO
해태 타이거즈. 사진제공|KBO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한때 프로야구를 넘어 사회적으로도 큰 유행을 탄 넋두리다. 1996년 선동열, 1998년 이종범이 차례차례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로 떠나자 당시 해태 타이거즈 김응룡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그러나 해태는 1998년에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통산 9번째 정상. 선동열, 이종범이 없어도 호남야구의 스타들로 구성된 해태는 막강했다. 그래서인지 삼성 라이온즈는 해태와 또 다른 호남팀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들을 유독 탐냈다.

‘해태왕조’의 원동력은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떡잎 때부터 남달랐던 인재들을 빼놓을 순 없다. 이는 또 초창기 프로야구의 신인지명제도가 해태에 선사한 태생적 강점이기도 했다. 해태는 우수자원이 풍부했던 호남에 근거를 둔 덕을 톡톡히 봤다.

한국프로야구의 지역연고제는 배타적·독점적 영업권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신인지명제도에도 적용돼 초창기에는 해당지역 고교 출신에 대한 1차지명을 무제한 허용했다. 첫 신인지명이 진행된 1983년부터 1985년까지다. 이 때문에 드래프트 방식의 2차지명은 유명무실했다. 팀당 1차지명 인원은 1986년 10명, 1987년 3명, 1990년 2명, 1991년 1명으로 축소됐다.

그러나 1996년부터 1998년까지는 연고지역 고졸예정선수를 3명까지 뽑을 수 있는 우선지명이 도입됐다. 우선지명은 1999년(팀당 1명)을 끝으로 폐지됐다. 2000년부터 지금과 같은 방식(1차지명 1명·2차지명 드래프트)으로 자리 잡았다. 우수자원의 편중현상이 개선되지 않자, 2010년부터 2013년까지는 잠시나마 1차지명을 폐지하고 전면드래프트가 실시됐다.

1차지명 체제에선 공동연고의 서울팀들끼리는 지명순서에 대한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지금은 LG 트윈스, 두산 베어스, 키움 히어로즈가 신사협정을 맺고 잡음을 원천차단하고 있지만 1990년대까지는 달랐다. 직전 시즌 순위의 역순으로 정하면 탱킹(tanking·신인드래프트 상위 지명권을 노려 고의로 지는 행위)이 불거졌고, 이해관계가 끝까지 맞서면 가위바위보 또는 주사위 굴리기까지 동원됐다. MBC 청룡-OB 베어스 시절부터다.

정재우 전문기자 ja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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