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모이’ 엄유나 감독 “사람 향한 애정, 사람 향기 품은 영화로”

  • 스포츠동아
  • 입력 2019년 1월 16일 09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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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 앤드크레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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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막, 이름을 걸고 만든 첫 번째 연출 영화를 세상에 내놓은 신인감독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좀처럼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했다. 설렘과 부담,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는 2019년 1월이 그에겐 “기적 같은 시간”이다.

영화 ‘말모이’를 연출한 엄유나(40) 감독의 이야기다. 재미있는 이야기꾼에서 따뜻한 시선을 견지한 연출자로 한 계단 올라선 그는 사람을 향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마음 깊은 곳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앞서 시나리오를 쓴 ‘택시운전사’에서도, 연출 데뷔작인 ‘말모이’에도, 감독의 시선은 유지된다.

엄유나 감독은 “의미 있는 작품보다,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자신이 10대 때부터 수없이 다양한 영화를 섭렵한 ‘영화광’이기도 하기에 더 그렇다. ‘말모이’에 나오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웃음 많고 정감어린 마음을 가진 것처럼, 그들의 세계를 완성한 엄유나 감독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웃을 때면 생기는 ‘반달 눈’이 더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와, 앞으로 내놓을 또 다른 영화들을 향한 기대까지 만들어낸다.

○ 영화 연출부로 출발, 시나리오 작가에서 감독까지

엄유나라는 이름이 영화계에 알려진 건 2017년 송강호 주연의 ‘택시운전사’부터다. 독일기자를 태우고 1980년 5월 광주로 간 택시기사의 시선으로 바라본 당대 사회를 담아낸 영화는 그해 여름 크게 인기를 얻어, 1218만 관객 동원에 성공했다. 엄유나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다. 그가 공식적으로 영화에 이름을 올린, 데뷔작이다.

영화 일의 출발은 연출부 막내였다. 수학을 전공으로 택해 대학에 진학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바라던 영화감독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재수 끝에 동국대학교 영화과 99학번으로 다시 입학했다. 때문에 졸업 뒤 영화 현장에 들어서는 일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영화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영화감독을 막연하게 꿈꿨다. 실천적인 의지가 강하다기 보다, 막연한 희망에 가까웠다.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아 망설였지만 정작 대학에 가고 보니 수업 듣기가 정말 싫더라.(웃음) 그래서 다시 수능을 보고 영화과에 갔다.”

엄유나 감독은 2006년 영화 ‘국경의 남쪽’ 연출부로 참여했고 이후 몇 번의 경험을 더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진학해 극영화 시나리오를 전공했다. 햇수로 15년 가까이 영화와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낸 셈이다. 그 결실이 ‘택시운전사’를 넘어 ‘말모이’로 이어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영화 일을 꿈꾸지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는 아니지 않나. 오랫동안 시나리오를 써왔음에도 영화가 된 건 ‘택시운전사’가 처음이었다. 시나리오가 영화로 만들어지는 확률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감독은 2016년 8월, 일제강점기 우리말을 지키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 과정은 어쩌면 ‘택시운전사’와도 맞닿아 있다. 대학원에서 시나리오를 익히고 난 뒤 인연이 닿은 영화 제작사 더램프의 박은경 대표의 제안으로 ‘택시운전사’ 시나리오를 맡은 게 시작이다. 이후 두 사람은 좁게는 영화와 관련한 이야기부터 넓게는 개인의 관심사와 가정의 대소사까지 공유하는 사이가 됐다. 믿음을 나눈 관계가 계속된 끝에 나란히 “일제강점기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로 시선이 향했다.

“솔직히 처음엔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교과서에서 보던 내용이라, 익숙한 것도 있었고. 그러다 박 대표님이 EBS 지식채널e에서 방송한 5분짜리 다큐 영상을 보여줬다. 조선어학회 내용이었다. 전국의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이 하나의 뜻을 품고 함께 했다는 사실에 울컥했다. 그것에 매혹 당했다.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며칠 뒤 ‘내가 하겠다’고 말했다.”

‘매혹’ 당한 이유는 여럿이다.

“엄혹한 시기에 벌어지리라고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고, “위험한 가운데 어떤 대가도 없이 벌인 일”이었다. 감독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아주 귀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시나리오를 쓰는 데 보낸 시간은 1년4개월. 당대 상황을 담기 위한 자료조사는 물론이고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전반적인 문화정책을 이해하는 과정도 필요했다. 영화에도 등장하듯 ‘민들레’ 같은 꽃 이름의 어원부터 한글에 대한 공부, 전국의 사투리도 조사해야 했다.

하지만 작업하는 동안 감독은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을 마주하고 의자에 앉아 보냈다. 노트북을 앞에 두고 한참 몰두하다, 문득 고개를 들면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고 했다.

“‘택시운전사’ 때도 그랬지만 ‘말모이’를 쓴 2017년의 기억이 나에겐 전혀 없다. 하하! 집에서도 쓰고, 동네 카페에서도 쓴다. 그럴 땐 일상이란 게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쓰고, 잠자다 깨서도 쓴다. 배고프면 밥 먹고 또 쓰고. 하하하!”

○ 유해진과 세 번째 만남 “나는 그의 팬”


엄유나 감독은 배우 유해진과 남다른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단지 감독과 배우의 만남으로만이 아니다. 유해진은 엄 감독이 연출부로 참여한 ‘국경의 남쪽’에 출연한 배우였고, ‘택시운전사’의 주연배우이기도 하다. ‘말모이’까지 더하면 벌써 세 편째 작업이다.

엄유나 감독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주인공 판수 역으로 유해진을 그렸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 유해진 역시 ‘말모이’가 담은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해 망설임 없이 출연을 결정했다.

세 번의 작업동안 매번 다른 ‘위치’에서 유해진과 만난 감독은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연출부 막내 시절엔 모든 배우들이 어려웠다. 하지만 유해진 선배님은 기본적으로 정말 좋은 사람이다. ‘국경의 남쪽’을 마치고도 늘 ‘유해진의 팬’이라고 말하곤 했다. 마음이 따뜻한, 귀한 배우이다.”

‘말모이’에 출연한 배우들은 엄유나 감독이 영화 연출은 처음이지만 현장에선 이를 의식조차 못했다고 말한다. 그만큼 능숙하고 노련했다는 의미다. 또 다른 주연 윤계상은 “감독님은 늘 배우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영화의 느낌 그대로 따뜻하게 현장을 이끌었다”고 했다.

완성한 작품을 확인한 관객들의 평가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한국영화에서 꾸준히 이어지는 일제강점기 시대극이 대부분 비극을 더한 역사적인 사건과 시대의 거대한 흐름 안에서 이야기를 풀지만 ‘말모이’는 조금 다른 위치에 있다. 그 시대 안에서 각자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소박한 사람들’에 눈을 맞추는 영화다. 때문에 시대극이긴 해도 ‘결이 다른 시대극’이다.

“돌아보면, 촬영 현장에서 나는 일하기에 급했다. 감독의 입장에서 어떤 감상에 젖기엔 여유가 전혀 없었으니까.(웃음) 오히려 촬영을 마치고 편집하면서 ‘참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더라. 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관두고 싶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일단 부딪히는 편이라, 늘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 그런 마음이었다. 하하!”

엄유나 감독은 “지금 머릿속을 채운 99.9%는 ‘말모이’”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돼 버렸다”면서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영화는 2주째에도 관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입소문도 퍼진다. 엄유나 감독의 세계에 관객도 공감하고 있어서다.

그는 “좋은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고 했다. “좋은 이야기로 관객과 만나고 싶다”고도 말했다.

“사람을 향한 관심이 많은데 영화 작업을 하면서 그런 애정은 더 커지고 있다. 영화를 하다보면 사람이 참 귀하다는 걸 느낀다. ‘말모이’ 뒤에 어떤 작품을 할지 지금으로선 잘 모르겠지만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를 할 건 분명하다.”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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