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에 적응한 효모가 당을 먹고 방귀 뀌면…술이 익어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4일 16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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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발효를 시작했군.”

레돔이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지난달 착즙해서 발효탱크 안에 들어간 사과즙이 ‘꿈틀’ 하더니 이윽고 콧방귀를 뀌기 시작했다. 착즙한 지 꼭 3주 만이다. 지난해 우리는 세 번의 사과 착즙을 했다. 홍옥이 나오는 여름 착즙, 새로운 품종을 시험해보라고 가져온 속 빨간 가을 사과, 그리고 부사가 나오는 겨울 착즙.

부사를 착즙하는 날엔 한파가 불었다. 젊은 친구들 셋이 와 일을 도왔다. 사과를 씻는 동안 바닥으로 흐른 물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들은 마당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언 손을 녹였다. 한창 젊은 그들은 일하는 중에도 쉬지 않고 웃고 떠들고 장난쳤다. 차가운 물에 동동 떠다니며 때를 벗는 사과도 “호호 깔깔” 웃으며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올해 시드르(사과즙으로 만든 술)는 청춘의 맛이 날 것 같아.”

레돔이 말했다. 그는 대체로 혼자 일했지만 사과를 수확하거나 착즙할 때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사과 궤짝을 들어 물속에 쏟아 붓고 씻어서 건져낸 뒤 분쇄하고 착즙해 발효탱크에 넣는 일은 혼자 하기에는 너무 거칠고 고독한 작업이었다.

“이렇게 힘든 노동 뒤에 한잔의 와인이 나온다는 걸 몰랐어요.”

코끝이 빨갛게 변해도 그들은 안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 피워놓은 장작불 앞에 서서 갓 착즙한 즙과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발효탱크 한가득 사과즙을 채운 뒤 떠났다. 겨우내 작업장 문을 열 때마다 콕 쏘는 사과 냄새와 청춘들이 남기고 간 웃음소리가 미묘하게 살랑거렸다.

“그냥 사과즙일 뿐인데 이대로 두면 술이 된다니 정말 신기해.”

과일의 당이 알코올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매번 그것이 신기했다.

“사과에는 원래 야생효모가 잔뜩 붙어있어. 우리 인간들의 성질이 다양하듯 사과에 붙은 효모도 각자 생명을 가지고 성격도 다 달라. 과일을 착즙하면 효모들은 차가운 즙 속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조용히 삶의 순간을 모색하지. 긴 한파에 천천히 적응하고 정신이 들면 사과 속의 당을 먹기 시작해. 먹고 나면 방귀를 뀌고 알코올을 내뱉어. 수많은 효모들의 성향들이 다른 만큼 뱉어내는 가스의 향과 맛도 달라지지.”

그는 사과즙 속에 헤엄치는 보이지 않는 효모를 살아있는 인격체처럼 대한다. 겨울에는 얼어 죽지 않도록 난로를 피우고, 여름엔 더워 기절하지 않도록 냉방기를 돌렸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단꿈에 젖은 효모들이 놀라지 않도록 작업장 문을 조심스레 열고 닫았다.

“효모들은 각기 자기 삶을 살아. 인간은 그냥 효모가 하는 대로 따라가며 탱크갈이나 할 뿐이지. 언제 발효를 끝낼지, 당을 얼마나 남길지, 알코올 도수는 몇 도가 될지. 이건 모두 효모 마음이야. 그러니까 올해 와인 알코올 도수가 몇 도일지 내게 묻지 말라니까.”

레돔은 뭔가 불만인 듯 말했다. 한국에서는 와인제조 허가를 받을 때 알코올 도수를 먼저 정해야한다는 법이 있다. 설탕이나 효모를 첨가하고 살균을 하는 등 인간이 컨트롤하는 제조 방식에서는 도수를 인위적으로 정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방식으로 발효를 할 경우에는 이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술을 병에 담은 후에도 발효가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알코올 도수가 변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허가받을 때 정한 알코올 도수와 다르면 불법이 된다.

“콕 쏘긴 하지만 아직은 사과 쥬스다. 아직 한참 더 가야 되겠는데.”

갓 발효를 시작한 사과즙을 맛보는 것은 양조장의 특권이다. 이곳이 아니면 맛볼 수 없고 이 순간이 지나면 더 이상 같은 맛이 아니다. 그는 매일 아침 살며시 발효실 문을 열고 즙을 받아와 나에게 내민다. 올 겨우내 나는 한파에 청춘들이 착즙했던 사과즙이 술이 되어가는 순간을 맛볼 수 있다. 애주가들이 탐내는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신이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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