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품으로 돌아온 남영동 대공분실서 “보고싶다 종철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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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서 박종철 32주기 추모제 처음 열려
“이제 정말로 경찰 굴레 벗은듯”, 영화 ‘1987’ 감독-배우도 참석
“당시 동아일보 추적보도 생생”

물고문으로 박종철 숨진 그곳서… 1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앞마당에서 고 
박종철 씨 32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참석자들이 1987년 1월 14일 대공분실 509호에서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진 박 씨의 
영정(오른쪽)과 지난해 별세한 그의 아버지 박정기 씨의 영정을 들고 서 있다. 박종철 씨의 영혼을 대공분실에서 데리고 나오는 
의식이다. 지난해까지 경찰청 인권센터로 쓰이던 이곳에 민주인권기념관(가칭)이 조성될 예정이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물고문으로 박종철 숨진 그곳서… 1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앞마당에서 고 박종철 씨 32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참석자들이 1987년 1월 14일 대공분실 509호에서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진 박 씨의 영정(오른쪽)과 지난해 별세한 그의 아버지 박정기 씨의 영정을 들고 서 있다. 박종철 씨의 영혼을 대공분실에서 데리고 나오는 의식이다. 지난해까지 경찰청 인권센터로 쓰이던 이곳에 민주인권기념관(가칭)이 조성될 예정이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남영동 대공분실이 시민 품으로 돌아오고 열린 첫 추모제 아닙니까. 라디오에서 우연히 소식을 듣고 뜻깊은 자리라 생각해 초등학교 동창 2명과 함께 왔습니다.”

13일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가칭)을 찾은 이주원 씨(25)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곳은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씨(당시 22세·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가 경찰의 물고문을 받다가 숨진 옛 남영동 대공분실. 경찰청 인권센터로 쓰이다가 지난해 12월 26일 행정안전부로 관리 권한을 넘긴 뒤 처음으로 박 씨의 32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민주인권기념관 앞마당에서 열린 추모제에는 박 씨의 친형 박종부 씨와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경찰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 씨의 어머니 배은심 씨를 비롯해 시민 등 약 500명이 참석했다. 김세균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마침내 박종철 열사가 32년 만에 경찰의 굴레에서 벗어나 대공분실 509호실에서 나올 수 있게 됐다”고 인사말을 했다. 박종부 씨는 “이 건물과 남영역이 더 이상 스쳐 지나가는 역이 아니라 기차 소리가 울리며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역이 됐으면 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행안부가 민간단체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운영을 맡긴 민주인권기념관은 올해 건물 설계 공모 등을 시작으로 2022년 완공을 목표로 한다.

추모제 시작 1시간 전부터 민주인권기념관에는 시민 발길이 이어졌다. 박 씨가 고문을 받다가 숨진 509호 옛 고문조사실 앞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들도 보였다. 고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붙이는 벽은 ‘종철아 햇살 참 좋구나’ ‘선배님의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 후배들이 지켜가고 발전시키겠습니다’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뀌는 이곳에서 편안하시길 빌어요’ 등 박 씨 동료, 지인과 시민이 쓴 메모로 채워졌다.

일부 참석자는 87년 당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숨졌다’며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던 경찰과 정부에 맞서 집요하게 고문치사를 추적 보도한 동아일보의 활약을 언급했다. 당시 본보는 정부의 보도지침 강요 등 언론 탄압에 굴하지 않고 ‘서울대생 쇼크사’로 묻힐 뻔한 사건을 끝까지 파헤쳤다. 박 씨의 사망 이틀 후 ‘대학생 경찰 조사 받다 사망’ 기사를 시작으로 ‘물고문 도중 질식사’ 보도로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드러냈다. 이후 1년간의 탐사보도를 통해 경찰의 고문치사 은폐 및 축소를 속속 밝혀냈다.

박종부 씨는 과거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동아일보의 ‘물고문 도중 질식사’ 기사는 한 줄기 빛이었다. 이 기사가 없었다면 민주화는 한참 늦어졌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이런 동아일보의 노력은 박 씨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에서 ‘윤 기자’라는 캐릭터로 형상화됐다. 박 씨 추모제엔 이 영화의 장준환 감독과 김경찬 작가, 김윤석 배우가 참석했다.

박 씨 고문치사와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은 2017년 개봉한 이 영화가 700만 관객을 돌파해 사회적 관심을 모으며 남영동 대공분실의 민간화 캠페인에 불을 붙였다. 김 작가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이후 대공분실에 올 때마다 박 씨가 여전히 갇혀 있는 느낌이었는데 이제야 시민 품에 온전히 안긴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이날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3층의 고문조사실로 추정되는 방도 공개됐다. 그동안 대공분실 2, 3층은 인권센터 업무 공간으로 쓰여 일반인은 출입하지 못했다. 이현주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이 방은 5층 고문조사실과 화장실 위치 등 구조가 흡사해 고문조사실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 방 한구석에 탁구 네트가 남겨져 있던 것으로 미뤄 볼 때 인권센터에서 일하던 경찰들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휴게실로 사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구특교 kootg@donga.com·김정훈·사지원 기자
#용산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박종철 32주기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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