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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곳에 佛法도 없다”… 범어사 암자서 태극기 만들어 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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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곳에 佛法도 없다”… 범어사 암자서 태극기 만들어 배포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입력 2019-01-09 03:00수정 2019-01-09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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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26화>부산 범어사
부산 범어사는 3·1운동 당시 지방학림과 명정학교를 중심으로 3차례에 걸쳐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제의 불교 왜색화에 맞서 전통 불교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온 범어사는 젊은 승려들을 중심으로 항일의 기백이 높은 도량이 었다. 지난해 범어사 3·1운동 유공비에서 재연된 만세운동. 부산시불교연합회 제공
“삼엄한 총검도 정의(正義)의 전진을 막지 못하였고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옥고에도 끝내 굴하지 않았으니 그 정기(正氣) 길이 이 땅에 빛나리라.”

부산 금정산 범어사 순환도로인 범어사로를 내려오다 보면 마주치는 ‘3·1운동 유공비’의 일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불교계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만해, 용성 스님이 이름을 올렸고, 불교계 교육시설인 중앙학림과 지방학림에서 수학하던 학인스님들이 본말사(本末寺)의 전국 조직망을 활용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범어사, 봉선사, 해인사, 통도사, 표충사, 동화사, 도리사, 김용사, 대흥사, 송광사 등 전국 16곳의 사찰이 대규모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 천년고찰에 불어온 3·1운동
주지를 지내며 3·1운동의 핵심 배후로 활동한 오성월 스님. 김화선 씨 제공
신라 문무왕 시절(678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범어사는 해동화엄십찰(海東華嚴十刹)로 꼽히는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당시 범어사는 일제 사찰령에 따른 불교의 왜색화에 맞서 우리 전통 불교를 되찾자는 운동의 중심지였다. 주지를 지낸 오성월 스님(1865∼1943)은 당대 선승(禪僧)으로 유명한 경허 스님을 모셔오고, 선원과 강원도 열었다. 각지에 근대식 포교당을 설립하고 명정(明正)학교를 세워 교육 활동에도 힘썼다. 범어사의 3·1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그는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해 임시정부의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오성월의 노력에 힘입어 젊은 승려와 학생들이 다수 재학하고 있던 범어사는 만세운동을 펼치기에 적격이었던 도량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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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하순 만해가 범어사에 왔다. 만해는 오성월 이담해 오이산 스님과 만나 거족적으로 봉기할 예정인 만세운동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만해를 만난 범어사 스님들은 중앙학림과 지방학림에 다니던 김법린 김봉환 김상기 등 7명을 불러 모았다. 그 자리에서 만해의 이야기를 전하고 만세운동에 동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김법린 등 7명의 범어사 청년 승려들은 곧바로 서울로 상경했다. 3·1운동 전날 만해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 받은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이 인사동에 있는 범어사 포교당에서 모임을 갖고 역할을 나눈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3·1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후 김법린과 김상호는 만해의 지시에 따라 범어사로 내려왔다. 이들은 삼엄한 경계를 피하기 위해 농민과 노동자로 변복해 독립선언서를 봇짐 속에 감추고 내려왔다.

7일 찾은 범어사에서 인근 유공비를 빼면 3·1운동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당시 일화는 구전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범어사율학승가대학원’이 들어서 있는 자리가 명정학교의 옛터다. 범어사에서 50여 년간 지낸 석공 스님이 3·1운동에 참여한 일능, 준산 스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얘기다. “범어사 말사인 내원암, 정련암에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작은 밀실이 있었다. 거사에 참여한 스님들은 이곳에서 태극기를 만든 뒤 손수레에 실어 동래 온천시장까지 몰래 운반했다. 스님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후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 전달하고 연락책도 마다하지 않았다.”

○ 검거와 밀고에도 꺾이지 않은 만세운동

근대불교사 연구자인 김화선 교사가 부산 금정중학교의 3·1운동 유공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부산=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서울에서의 3·1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범어사 스님과 지방학림 학생들의 3·1운동 시위는 3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이들은 결사대를 조직해 독립선언서 5000장을 등사한 후 3월 6일 오후 범어사에서 선언식을 거행했다. 7일에는 차상명 김봉환의 주도로 30여 명이 동래시장 중앙에서 선언문을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경찰서로 돌진했지만 경찰에 의해 연행됐다.

다음 거사는 동래읍 장날인 3월 18일로 준비됐다. 스님과 청년들이 앞장서고 주민들이 동참하기에 장날이 적당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거사 전날인 17일 명정학교 졸업생들의 송별회가 열렸다. 회합 장소인 범어사에는 40여 명이 모였다. 나라 잃은 설움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있던 젊은 스님과 학생들은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송별회를 마친 후 밤을 이용해 동래읍으로 향했다. 눈에 띄지 않게 길은 피하고 선리(仙里·현재 금정중 인근) 뒷산과 동래 향교 뒷산을 넘어 읍내에 잠입했다. 18일 오전 1시경 범어사 동래포교당(부산 법륜사)에 도착했다. 장터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거사를 준비하고 단행하기에 가장 적합했다. 시장기를 달래려고 시장에서 곶감을 사와 먹고 있을 때였다. 일본 경찰과 헌병 20여 명이 들이닥쳤다. 밀고가 있었던 것이다. 일경은 김영규 차상명 김상기 김한기 등을 검거해 동래경찰서로 연행하고 나머지 대중은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때만 해도 일경은 범어사의 만세운동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주동자를 검거하고 해산시키면 더 이상 아무 일이 없을 것으로 예상한 듯하다. 하지만 포교당이 아닌 곳에서 또 다른 이들이 준비하고 있었다. 지방학림에 다니는 허영호 집이 장터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1000여 장의 독립선언서와 함께 대형 태극기 한 개, 소형 태극기 1000여 개를 준비한 상태였다.

강제 해산당한 그날 저녁 동래읍 서문 인근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근우 김해관 김재호 박재삼 신종기 윤상은 박영환 등 4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동래시장까지 이르렀다. 범어사 3·1운동 유공비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우리 고장 범어사에서도 젊은 학도들이 제세의 사명을 자각하고 구국의 비원(悲願)을 불전에 맹세하며 나라와 자유 없는 곳에 진정한 불법(佛法)도 있을 수 없다는 대승정신으로 3월 18일 동래시장 등에서 독립선언문을 산포(散布·흩어져 퍼짐)하고 만세 소리를 높게 외치니 운집한 군중도 동조하였다.” 이날 밤에 전개된 기습 시위는 일경이 미처 대처하지 못했다. 이 시위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19일 더 큰 규모의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했다.

○ “한 번 죽음은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一死莫如得自由)”

19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미리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한 허영호는 윤상은 이영우 황학동 등을 통해 “한 번 죽음은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一死莫如得自由)”는 내용을 담은 격문 수백 장을 동래시장 입구에서 뿌렸다.

오후 5시, 동래시장 남문에 집결한 범어사 지방학림과 명정학교 학생 수십 명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한 시간 뒤 또 다른 학생 수십 명이 시장에 모여 같은 시위를 전개했다.

깜짝 놀란 일경은 무자비한 방법으로 참가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3월 19일 동래시장 만세운동으로 연행된 인물은 100여 명에 이르며 34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김영식 박재삼은 집행유예 6년, 다른 참가자들은 징역 6개월에서 2년을 언도받고 부산과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핵심 주동자의 한 사람인 김법린은 만세운동 뒤 검거망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탈출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 일을 빌미로 일제는 범어사 지방학림과 명정학교를 강제 해산시켰다. 지방학림은 범어사 승가대학(강원)으로, 명정학교는 부산 금정중학교와 청룡초등학교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지방학림과 명정학교 학생들이 어둠을 이용해 동래읍으로 향했던 선리 뒷산 인근에 자리한 금정중학교에는 1970년에 세운 또 하나의 ‘3·1운동 유공비’가 있다. 이 비는 그날의 역사를 이렇게 전한다. “금정산 기슭 호국의 전통이 스며 있는 수월도량에서도 제세의 사명을 통절히 자각하고 구국의 비원을 불전에 맹세하며 분연히 일어서니 이는 곧 나라와 자유 없는 곳에 진정한 불법도 있을 수 없다는 대승정신의 발로라 할 것이요… 모진 고문과 가혹한 옥고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굴하지 않음은 나라와 자유를 찾으려는 우리의 결심을 저들이 꺾지 못함이라. 아아 그 뜻 장할시고 세월이 흘러 님들은 가고 또 가고 거룩한 위국정신과 훌륭한 그 업적은 해방된 조국에서 자유를 누리는 후생들의 가슴에 불명의 빛이 되고 엄숙한 교훈이 될 것인 바….”

7일 이곳에서 만난 근대불교사 연구자인 김화선 교사(금정중 교무부장)는 “범어사에는 강원과 선원 등에서 150여 명이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규모”라며 “3·1운동과 관련해 많은 이들이 혹독한 조사를 받았지만 대중의 신뢰와 존경이 대단했기 때문에 오성월이 핵심 배후라는 걸 아무도 발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창씨개명을 이유로 오성월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한 것은 아쉽다는 의견이 이어졌다. 김 교사는 “사찰령하의 일제에서 주지를 맡으려면 창씨개명은 불가피했다”라며 “공적과 당시 상황을 감안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부산=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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