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名문장/김상미]스스로를 믿으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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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등급이다. 나는 2등급이었다. 무통은 변하지 않는다.”―필립 드 로칠드 남작 ‘무통 로칠드 1973’


1855년 보르도상공회의소는 효과적인 와인 전시를 위해 샤토(포도밭)를 다섯 등급으로 나눠 발표했다. 2주 만에 급조된 이 등급표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지금도 보르도 와인 가격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1등급의 영예를 차지한 샤토는 오브리옹, 라피트, 라투르, 마고였다. 무통 로칠드는 2등급에 그쳤다. 무통의 오너였던 너새니얼 로칠드의 실망은 컸다. 그가 무통을 매입한 것은 등급표가 만들어지기 불과 2년 전이었다. 너새니얼은 은행가 집안인 로칠드 가문의 영국계 후손이었다. 1등급 샤토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무통이 2등급을 받자 영국인 소유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돌았다. 너새니얼의 한을 풀어준 이는 증손자 필립이었다. 1922년 무통을 이어받은 필립 남작은 1등급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무엇보다 품질에서 앞서고자 했다. 1920년대 당시 샤토들은 와인을 만들면 배럴에 담아 중개상에 넘겼다. 무통은 완벽을 기하기 위해 와인을 병에 담아 출고하는 최초의 샤토가 됐다. 1945년부터는 피카소, 달리, 미로 등 유명 화가를 해마다 선정해 레이블을 그리게 함으로써 무통을 수집가의 애장품으로 만들었다.

1973년 무통은 1등급이 됐다. 1855년 작성된 등급표가 바뀐 것은 현재까지 이때뿐이다. 필립 남작은 이를 기념하며 1973년산 무통 와인 레이블에 글을 남겼다. ‘나는 1등급이다. 나는 2등급이었다. 무통은 변하지 않는다.’ 품질은 한결같고 앞으로도 최고를 유지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말이다.

김상미 와인칼럼니스트
김상미 와인칼럼니스트
살다 보면 남의 평가에 휘둘리는 자신을 만날 때가 많다. 호의적인 평가에 속없이 기분 좋아하고 악의적인 평가에 밤잠을 설치며 억울해한다. 그럴 때마다 필립 남작이 남긴 이 말을 떠올리며 나를 독려한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나의 실력과 늘 최선을 다하는 자세라고.
 
김상미 와인칼럼니스트
#와인#샤토#보르도상공회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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