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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교황-황제를 쥐락펴락… 절대권력 가진 자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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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교황-황제를 쥐락펴락… 절대권력 가진 자본의 탄생

유원모 기자 입력 2018-12-29 03:00수정 2018-12-29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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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의 탄생/그레그 스타이네츠 지음·노승영 옮김/384쪽·1만8000원·부키
역사상 최고의 사업가 야코프 푸거, 막대한 부 이용해 유럽史 좌지우지
황제에게 빚 상환 독촉장 보내 압박… 교황 설득 고리대금 허용하게 해
16세기 초 야코프 푸거의 공공 주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 지어진 ‘푸거라이’의 모습. 5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1년에 약 1100원(0.88유로)이라는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으로 운영된다. 부키 제공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 닉슨의 워터게이트, 베트남 전쟁까지…. 1994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지능지수(IQ)가 75에 불과한 주인공 톰 행크스(검프 역)가 현대사의 주요 장면에 등장해 흐름을 바꿔놓는다는 흥미로운 소재의 영화다. 물론 100% 허구의 이야기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상, 가톨릭교회의 대금업 금지 철폐, 면죄부 판매와 종교개혁, 복식부기의 전파 등 15∼16세기 중세 유럽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은 이 같은 사건들에서 공통적으로 한 사람이 등장한다면 어떨까. 영화가 아니라 실재한 역사다. 바로 이 책의 주인공 야코프 푸거(1459∼1525)다.

푸거는 독일에서는 역사상 최고의 사업가로 여겨지지만,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현대 자본주의의 선두 주자인 미국에서조차 생소한 인물로 여겨졌다. 이 책은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의 유럽지사에 기자로 근무했던 저자가 2015년 영어권에 본격적으로 푸거를 소개한 것이다.

16세기에 출판된 푸거 가문 연대기의 표지로 쓰인 야코프 푸거의 초상화. 부키 제공
1525년 푸거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재산은 유럽 내 총생산의 2%에 육박할 정도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금수저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지역의 평민 집안에서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푸거가 물려받은 것은 작은 규모의 직물 매매였다. 그는 새로운 방식의 수익 모델을 구상한다. 투자에 가까운 채권 방식의 대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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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오스트리아의 슈바츠에 위치한 은 광산은 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흥청망청 생활로 유명한 지기스문트 대공이 이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푸거는 그에게 거액을 빌려주고, 그 대신 슈바츠의 모든 수입을 갖기로 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당시 오스만튀르크의 침공이 빈번했던 헝가리의 구리 광산 채굴권을 독점해 나갔다. 구리는 당시 전쟁의 주요 무기인 대포와 소총의 주원료였기 때문에 푸거는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거부로 성장한 푸거는 가톨릭 교회와 역사적인 협상에 나선다. 당시까지 고리대금을 죄악시한 교회의 방침을 바꾸기로 한 것. 이를 위해 오래전부터 후원해 온 젊은 신학자들을 통해 이론적 배경을 마련하고, 주교 교황 등 교회 최고위층에 서슴없는 로비까지 한다. 결국 교황 레오 10세는 이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칙령에 서명을 했다. 금융이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현대 은행의 제도적 기반이 조성된 것이다.

푸거는 당시 유럽의 정치까지 쥐락펴락했다. 1523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소신이 없었다면 폐하께서는 황제관을 쓰지 못하셨을지도 모릅니다. 빌려드린 돈은 이자까지 계산해 지체 없이 상환토록 명하소서”라는 독촉장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 황제는 선거로 뽑았는데 카를 5세가 막대한 선거 비용을 푸거에게서 빌려왔기 때문이었다.

책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본이 정치와 종교의 영향력을 압도하기 시작했던 15∼16세기 유럽을 푸거라는 한 자본가를 통해 비추고 있다. 탁월한 글 솜씨에 풍부한 사료 분석이 더해져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흥미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책이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자본가의 탄생#야코프 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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