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원 봉주르 에콜]〈13〉암기 말고 마음으로 배우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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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원 하비에르국제학교 한국어·프랑스어 교사
임정원 하비에르국제학교 한국어·프랑스어 교사
프랑스 학생들은 시 외우는 것에 익숙하다. 유치원부터 ‘콩틴(comptine)’이라는 운을 맞춘 짧은 시를 외우는 훈련이 잘 돼 있기 때문이다. 콩틴 외우기는 초등학교 때 중요한 숙제 중 하나다. 공책에 시를 붙이고 옆면에는 그 시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몸짓과 함께 그 시를 외운다. 보통 1, 2주에 한 편을 하는데, 시 외우기는 초등학교 교육과정과 평가에서 중요 항목이다.

어려서부터 놀이처럼 시를 많이 외워서인지 프랑스 학생들은 시를 별로 어려워하거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프랑스 중고교에서 한국어 수업을 할 때, 1년에 10편 정도의 한국 시를 꼭 가르쳤는데, 시가 어렵고 싫다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우리의 ‘거점학교’ 수업처럼 파리 학생들이 모여 듣는 고교 연합 한국어 수업을 할 때다. 한국어를 잘하는 ‘고급반’ 학생들에게 패러디 시를 짓게 했더니, 정호승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바꿨다. “나는 다리털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 다리에도 털이 있어야 따뜻하다. … 다리에 있는 털이 살을 감싸 안아주는 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국어가 서툰 학생들도 한국 시를 외우거나 베껴 쓰는 것을 좋아했다. 프랑스 고교에서는 보통 4월 ‘시의 봄’ 주간이 있어서 학생들이 자신이 지은 시나 배운 시를 써서 시화전을 하는데, 초급반 학생들도 제법 예쁜 글씨로 한국 시를 써서 인기를 끌었다. 필수과목인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배우는 중학생들은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자세히 배우고 말하기 시험으로 외웠다. 발음이 서툴러서 “나보기가 요기요 가실 때에는 말없이 거의 보내 드리오리다”처럼 들렸지만 대부분 끝까지 잘 외웠다. 기본 단어와 표현은 그렇게도 못 외우면서 말이다. 그때의 제자 로라가 얼마 전에 찾아왔는데 ‘진달래꽃’을 아직도 줄줄 외워서 기특했다. 프랑스 학생들은 암기를 정말 잘 못하고 싫어하지만 시 외우기는 예외인 것 같다.

한편 프랑스 학교에서는 연극 교육도 중시한다. 특히 중학교 때는 필수적으로 17세기 고전극의 대사를 외워야 하고 이는 성적에 포함된다. 그리고 무대에 올릴 때 같은 등장인물을 장면이 바뀔 때마다 다른 학생이 맡아 하기 때문에, 반 학생들 모두 고루 비슷한 양의 대사를 외우게 된다. 중2부터 다니기 시작한 아이는 프랑스어를 겨우 깨치자마자 몰리에르의 희곡 ‘수전노(L‘Avare)’의 대사를 무조건 외워야 했는데, 지금도 그때의 대사를 잘 기억해 말장난을 하곤 한다. 고교에서는 더 이상 시 암송이나 연극은 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문학작품 분석을 배운다. 하지만 연극은 아틀리에(특별활동) 수업에서 따로 배워 바칼로레아에서 자유선택 과목으로 시험을 볼 수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고교 시절 연극 아틀리에 수업에서 교사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프랑스 교육은 암기가 아니라 창의성을 강조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렇게 시와 연극 대사를 말로 외우는 것이 교육과정에 포함돼 있고 실제로 중시된다. 프랑스 학교에서는 ‘외우다’의 뜻으로 ‘m´emoriser’(암기하다)라는 단어보다 ‘apprendre par coeur’(마음으로 배우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어려서부터 몸과 마음으로 외운 문학작품 구절들이 창의성의 바탕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구절을 프랑스 고교 철학 시간에 배우는 이유를 생각해 보게 된다.
 
임정원 하비에르국제학교 한국어·프랑스어 교사
#프랑스어#시의 봄#시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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