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종전 후 독일, 왜 여성들은 해방을 맞지 못했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22일 03시 00분


코멘트

◇현대사 몽타주/이동기 지음/422쪽·2만 원·돌베개

영화 ‘베를린의 여인’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익명의 저자가 쓴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생존을 위해 성매매에 나서야 했던 독일 여성의 비참한 경험을 담았다. 돌베개 제공
영화 ‘베를린의 여인’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익명의 저자가 쓴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생존을 위해 성매매에 나서야 했던 독일 여성의 비참한 경험을 담았다. 돌베개 제공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대다수 국가에서 ‘해방’과 같은 이름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 ‘해방’은 또 다른 폭력의 시작이었다. 패전국이었던 독일에서는 종전 뒤 무려 86만 명에 이르는 여성이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 소련군에 의한 피해 여성이 약 50만 명이었고, 미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여성도 19만 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70년이 지난 2015년 독일에서 출간된 책 “군인들이 도착했을 때: 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 여성의 강간”이 공개되고 나서야 ‘해방’의 이면이 정식으로 폭로됐다.

전승국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에서도 종전은 해방이 아니었다. 1945년 5월 알제리 세티프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알제리인들이 프랑스 군인과 민병대에 의해 최대 4만5000여 명이 희생됐다. 알제리는 지난한 투쟁 끝에 1962년이 돼서야 독립할 수 있었다.

‘현대사…’는 이처럼 세계에서 새로 발굴된 사료와 최신 연구를 통해 현대사의 정설로 굳어진 역사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책이다. 그동안 ‘승자의 역사’ 입장에서 숨겨져 왔던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연구들을 대거 포함시킨 점이 눈길을 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최신 연구를 보자. 구동독 정부 소장 자료가 비밀 해제되면서 새롭게 알려진 사실은 학살이 주로 가스실 등 ‘공장 시스템’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채 진행한 ‘대면 학살’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역사학의 명제에 의문을 들게 한다.

반대로 유대인을 구출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걸었던 독일군 안톤 슈미트 상사와 스웨덴의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 빈 주재 중국 영사 허펑산 등은 최근에서야 존재가 확인됐다. ‘악(惡)의 평범성’이 아닌 인간에게 ‘선(善)의 평범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현대사는 ‘장기 폭력사’와 ‘단기 평화사’로 구성된다”는 저자의 해석처럼 전쟁과 폭력이 끊이지 않았던 20, 21세기 현대사의 큰 줄기와 인권, 평화를 위해 노력한 의인(義人)들의 노력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현대사 몽타주#이동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