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자의 ‘사談진談’]임아, 그 선에 서지 마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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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조사 당시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취재진이 설정한 포토라인.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조사 당시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취재진이 설정한 포토라인.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변영욱 사진부 차장·‘김정은.jpg’ 저자
변영욱 사진부 차장·‘김정은.jpg’ 저자
일본 경제계 거물이 전격 체포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외신에 따르면 카를로스 곤 닛산자동차 회장(64)은 일본 검찰에 체포돼 현재 도쿄 인근 수감시설에 머물며 추가 수사를 받을 예정이다.

많은 이들의 궁금증 한 가지. ‘왜 곤 회장의 체포 구속 사진과 영상이 없을까?’ 우리 같으면 거물이 검찰청사에 들어서고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지며 기자들이 몰려드는, 흔히 보아온 그 장면이 연출됐을 것이다. 검찰청이나 경찰서 ‘포토라인’(기자들이 취재 편의를 위해 접근하지 않기로 합의한 사진 촬영지역)에 선 장면 말이다.

일본 신문과 방송은 곤 회장의 구속 장면을 촬영하지 못했다. 포토라인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 사진기자들은 피의자가 검찰에 들어가는 시간 등에 관한 정보를 거의 받지 못한다. 그래서 중요한 사건이 터지면 현장에서 마냥 기다린다. 그러다가 수상한 차가 나타나면 대형 플래시를 딱 한 번 터뜨린다. 그만큼 평소에 연습을 많이 해두어야 하고 고성능 장비를 사용해야 한다. 한 번 실수하면 사진은 없다.

한국에서 포토라인은 일상화된 풍경이다. 국민의 관심이 높은 사안의 관련자들이 수사를 받을 경우 검찰은 일정을 미리 공개한다. 기자들은 검찰이 공개한 소환 시간보다 한두 시간 앞서 검찰청사로 출동해 노랑 테이프로 취재진의 출입 한계선을 표시한다. 1995년 노태우 전두환, 2009년 고 노무현, 2017년 박근혜, 2018년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전직 대통령 5명이 포토라인에 섰다. 한국의 포토라인 앞에 성역은 없다고 봐도 좋다.

포토라인에 서서 ‘얼굴이 팔리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는 ‘추락’을 의미한다. 수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거침없이 몰려드는 취재진과 시위대 앞에서 평상심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게다가 카메라는 영화제 레드카펫에 선 배우가 아니라 벼랑 끝에 몰린 이를 겨냥하고 있다. 식은땀이 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포토라인에 서는 이들은 철저하게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컨설팅 업체와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어떤 복장과 표정으로 나타나 어떤 얘기를 할지 각본을 짠다. 포토라인을 피하는 방법도 진화해 왔다. 1999년 옷 로비 사건 때 김태정 전 검찰총장의 부인은 대역을 세워 기자들을 완벽하게 피했다. 정경유착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귀가하던 대기업 총수들은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에 반사판을 대는 방식으로 카메라 플래시를 피하는 ‘신공’을 발휘했다. 질문하는 취재기자를 향해 레이저 눈빛으로 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우병우 전 민정수석은 준비가 덜 된 아마추어다.

포토라인은 한국에서 만들어진 ‘콩글리시’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카메라맨을 위해 촬영 기회를 준다는 의미에서 촬영 기회(photo opportunity) 또는 촬영 장소(photographers‘ area) 정도로 불린다. 국내에서 포토라인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선거법 위반 사건 당시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 정 전 회장은 검찰청에 소환됐다가 카메라에 부딪혀 이마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다. 이듬해 기자들이 질서 유지와 피소환인의 인권 보호 차원에서 검찰 공보관과 협의해 포토라인을 설정하기 시작했다는 게 유래에 관한 정설이다.

포토라인을 위해 바닥에 테이프를 붙이는 사람들은 사진·영상기자들이지만 포토라인 설치 가능 여부는 검찰과 법원, 그리고 경찰의 판단이다. 사법·행정기관의 취사선택에 따라 포토라인이 결정된다. 최근 송인배 대통령정무비서관의 경우 검찰이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토요일에, 그것도 비공개로 소환해 포토라인에 서지 않았다. 포토라인의 기준이 없으면 자칫 언론 플레이로 비칠 위험도 있다. 검찰 입장에서는 공개적으로 불편부당한 수사를 시작했다고 세상에 공표하는 것이지만 법의 심판을 받으러 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보다 먼저 여론의 심판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쩍 늘어나는 포토라인 빈도와 시위대 피켓을 보며 든 생각이다.
 
변영욱 사진부 차장·‘김정은.jpg’ 저자 cut@donga.com
#검찰#수사#포토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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