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세계 경제 꽃길이 ‘9회말’이라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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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뉴욕 특파원
박용 뉴욕 특파원
‘적자 장부를 흑자로 바꾼다’는 미국 최대 쇼핑 대목 블랙프라이데이(23일)에도 웃지 못한 가게들은 있었다. 뉴욕 맨해튼 브라이언파크 주변엔 ‘폐점 세일’ 광고문을 몸 앞뒤로 두른 아르바이트 남성이 서성거렸다. 근처 5번가 백화점 로드앤드테일러 매장의 ‘땡처리 폐업 세일’을 알리는 이였다. 뉴욕에선 매장이 문을 닫을 때면 장례를 치르듯이 이런 ‘폐업 홍보맨’들이 거리에 등장한다.

1826년 창업한 로드앤드테일러의 뉴욕 5번가 매장은 크리스마스 시즌엔 특별한 곳이었다. 뉴욕 백화점 중 처음으로 거리 윈도를 크리스마스 테마로 장식하는 ‘크리스마스 윈도 극장’이 여기에서 시작됐다. 올해는 윈도에 산타클로스나 루돌프가 끄는 썰매, 생강과자로 만든 동화 속 집 대신 ‘70∼80% 폐업 세일’을 알리는 요란한 광고문이 덕지덕지 붙었다. 2012년 로드앤드테일러를 인수한 캐나다 회사 허드슨베이는 “수익성을 높이고 디지털 사업 기회에 집중하겠다”고 폐점 이유를 설명했다.

골목상권을 죽이는 원흉으로 손가락질 받던 대형 오프라인 유통회사들이 이제는 새 도전자인 온라인과 모바일 쇼핑에 밀려 픽픽 쓰러지고 있다. 125년 전 카탈로그 우편 판매라는 혁신적인 유통 기법으로 시장을 장악했던 유통회사 시어스는 인터넷 쇼핑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10월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올해 블랙프라이데이 시즌에 인터넷 쇼핑은 급성장했지만 오프라인 매장 고객은 5∼6% 줄었다. 시장 변화의 힘은 이렇게 무섭다.

110년 된 미국의 자동차 회사 제너럴모터스(GM)가 최근 2009년 이후 최대 규모의 구조조정 계획을 내놓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눈 밖에 날 것을 각오한 결단이다. 거스를 수 없는 시장 변화의 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GM은 방만한 경영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파산 문턱까지 갔다가 정부 지원으로 간신히 살아났던 전력이 있다. 위기가 오기 전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미래 성장동력인 전기차와 자율주행차에 투자할 현금을 챙기겠다는 것이고, 실업률이 사실상 완전고용에 가까워 구인난이 있을 때 구조조정을 하는 게 근로자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비정하다고 손가락질만 하기도 어렵다.

20년 전만 해도 기업 경영의 교과서, 미국 최고의 기업으로 추앙받던 126년 역사의 제너럴일렉트릭(GE)은 이젠 자산 매각 없이 빚을 갚기 어려운 불안한 기업이 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GE의 몰락은 기업 부채가 역대 최대로 부풀어 오른 시장에 도미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며 “국제결제은행(BIS)은 금리가 올라 차입 비용이 증가하면 영업 비용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좀비기업’의 증가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금리 상승과 주식시장 침체 등으로 9년 넘게 이어지던 미국 경제의 회복세와 호황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7회말론’, 내년부터 꺾인다는 ‘9회말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몰라도 호황은 언젠가 끝난다는 건 불변의 진리다. 지나치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으나 경제를 책임지는 감독이나 시장에서 뛰는 선수는 ‘9회말 투아웃’의 심정으로 시장과 부채 등 위기 요인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너도나도 살겠다고 구명정으로 뛰어들 때는 늦는다.

사족(蛇足) 하나 붙이자면 로드앤드테일러가 떠난 뉴욕의 11층짜리 이탈리아 르네상스풍 건물엔 혜성처럼 등장한 사무실 공유 스타트업인 ‘위워크(Wework)’가 내년부터 둥지를 튼다. 노화된 피부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새살이 돋는 것이다. 잘나가는 도시와 그 경제는 이렇게 돌아간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
#블랙프라이데이#폐점 세일#경제 호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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