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성 물려주려 했는데…이혼하고 혼인신고 다시 하라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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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년 11월 25일 07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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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폐지 10년 ①] 법이 막는 ‘엄마 성 따르기’
민법상 ‘부성주의 원칙’ 규정 여전…“성차별 정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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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姓)을 물려주는 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큰 움직임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돌도 되지 않은 딸이 있는 A씨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한 뒤 자녀에게 자신의 성씨를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처음에는 아쉬워하던 A씨의 남편 역시 A씨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A씨가 임신 기간 동안 겪어야만 했던 고초를 옆에서 지켜보는 한편, 여성차별에 대해서도 함께 수차례 깊은 이야기를 나눴던 덕이다.

그러나 지난 5월 출산을 앞두고 성 변경 문의를 위해 가정법원의 문을 두드렸을 때 A씨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혼인신고서의 4번 항목, ‘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했는가’라는 항목에 ‘예’라고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씨를 물려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A씨는 “당시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고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으니 엄마 성씨를 물려주고 싶다”고 항변했지만,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이혼한 뒤 다시 혼인신고를 올리면 된다”는 매몰찬 답변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결국 A씨의 딸은 A씨가 아닌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됐다.

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A씨는 자녀에게 성씨를 물려주기 위해 백방으로 방도를 찾고 있다. A씨는 “고작 작은 박스에 체크 하나 하지 못했을 뿐인데 성 변경 허가 청구 재판을 받아야 하고 친부의 의견도 필요하다고 한다”며 “아기의 이름을 볼 때마다 ‘나도 부모인데 왜 내 성을 붙여 줄 수는 없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어 울적해지곤 한다”고 토로했다.

성평등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아버지의 성을 따라야만 하는 ‘부성(父姓)주의’에 반대하는 여성도 빠르게 늘고 있다. 어머니의 성을 자녀에게 물려주려 하거나, 나아가서는 아예 자신의 성을 어머니의 성씨로 바꾸려는 여성도 적지 않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지난 3월 실시한 ‘자녀의 성 결정 제도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연구’에 따르면 설문 응답자 3303명 중 67.6%가 ‘부성주의 원칙은 불합리하다’고 응답했다. 2013년 조사에 비해 5.7% 증가한 수치다. 남녀별로 살펴보면 남성의 54.5%, 여성의 77.1%가 ‘불합리하다’고 응답하는 등 성별에 따른 의식 차이도 엿보였다.

그러나 폐지된 호주제를 대신할 법이 시행된 지 이미 10년이 지났음에도 남성만이 가족을 대표하는 가장이 될 수 있다는 통념은 여전히 각종 제도를 통해 남아 있는 상황이다. 자녀의 성과 본을 규정한 민법 제781조가 대표적이다.

개정된 민법 제781조 제1항은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고 가장 먼저 규정하고 있다. 부모가 혼인신고를 할 때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했다면 엄마의 성씨를 쓸 수 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엄마 성 쓰기는 예외나 다름없는 셈이다.

만일 혼인신고를 하는 부부가 의논해 엄마 쪽 성을 물려주기로 했더라도 번거로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혼인 신고서의 해당 항목에 표시를 하면 담당 공무원은 부부에게 협의가 충분했는지를 물은 뒤 협의서를 따로 제출하도록 한다.

개정 민법 시행 이후 선택지를 마련해 놓았다고는 하지만, 이처럼 여전히 가족은 가장인 아버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디폴트’(고정항목)다. 남성만이 가정의 기둥이 될 수 있다는 통념을 계승하는 동시에, 급격하게 변화하는 의식의 속도를 제도가 따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혼인 신고서 양식 4번 항목에 자녀 성·본 협의 여부를 묻는 문항이 실려 있다. © News1
혼인 신고서 양식 4번 항목에 자녀 성·본 협의 여부를 묻는 문항이 실려 있다. © News1

전문가들은 부성주의가 가족제도 안에 깊게 박힌 남성 중심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기제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성씨를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형식적 차원이 아니라 가족 내에서 구성원의 위상을 결정한다”며 “우리 사회의 친족 제도에서 여성은 남성의 가계에 편입되고, 부계 혈통을 이어 나가는 부차적이고 도구적인 위치에 머물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같은 문제의식에 힘입어 가정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위치를 동등한 위치에 놓기 위해 제도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8월 양성평등 관점에서 가족제도와 문화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제3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을 보완했다. 자녀의 성과 본을 결정하는 시점을 혼인신고에서 자녀의 출생 때로 확대하도록 검토하는 방안이 여기에 포함됐다.

여기서 나아가 가정에서부터 성평등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불평등한 결혼 제도가 아닌 시민 결합 제도 등을 고안해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지적이 함께 나온다.

윤김 교수는 “인식의 속도를 제도가 따르지 못한다는 것은 지금의 결혼 제도가 낙후했다는 뜻이기도 하다”며 “어머니의 성을 따르더라도 상관없는 등의 변화가 있으려면 생활동반자법이나 파트너 등록법 등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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