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마을서 ‘억대’ 매출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3일 16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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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하장에 짐을 내려놓는 고령자. 도쿠시마=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출하장에 짐을 내려놓는 고령자. 도쿠시마=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시달리는 일본의 지방에는 주민들이 자조(自助)하면서 위기에 적응하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해 가는 작은 마을이 적지 않다. 집 근처의 흔한 나뭇잎을 팔아 억대 매출을 올리는 노인들이 있는가 하면, 젊은 전문직 인재들을 적극 유치해 마을의 활로를 찾는 마을도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정보화기기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19, 20일 시코쿠(四國) 지방 도쿠시마(德島)현의 산골에서 그렇게 변신하고 있는 마을 두 군데를 찾아가 봤다.


도쿠시마현 산간부의 가미카쓰(上勝)정은 인구 1570여 명의 작은 마을이다. 이 중 65세 이상 고령자가 52%를 차지한다. 일본에서 골칫거리로 지적되는 ‘한계마을’, 즉 젊은이들이 떠난 뒤 노인들만 남아 사회공동체 유지가 곤란해진 마을의 전형이라 할 만한 곳이다.

하지만 직접 가본 마을에는 활기가 넘쳤다. 정보화기기를 활용한 ‘잎사귀 비즈니스’의 성공으로 고령자들이 건강하게 일하고 있었다. 최고 연간 2000만 엔(약 2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농가도 있었다.

가미카쓰정의 잎사귀 비즈니스란 일본 요리를 장식하는 제철 잎사귀, 꽃 등 ‘장식용 야채’를 고령자들이 재배부터 출하, 판매까지 맡아서 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 요리에 쓰이는 잎사귀 종류는 320종 이상으로 사시사철 다양한 잎사귀를 출하한다. 마을에서 약 150가구, 300여 명이 이 일에 종사한다. 일손의 중심은 70대 고령자로 절반 이상이 여성이다.

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따는 니시카게 할머니 81세. 도쿠시마=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따는 니시카게 할머니 81세. 도쿠시마=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고령자들, 나뭇잎 따서 팔아 억대 매출도

산중턱에서 홀로 살며 잎사귀를 모아 납품하는 니시카게 유키요(西蔭幸代·81) 할머니도 그런 고령자 중 한 사람이다. 19일 오전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는 집 근처에서 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땄다. 바구니를 가득 채우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요즘은 단풍잎이 인기래. 잎사귀는 곱고 가벼워서 나 같은 노인도 힘든 줄 모르고 일할 수 있어요. 정년도 없죠. 100세까지는 일하려고 해요.”

단풍잎을 손질하는 니시카게 할머니. 도쿠시마=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단풍잎을 손질하는 니시카게 할머니. 도쿠시마=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니시카게 할머니는 26년 전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 본래 휴대전화도 쓸 줄 모르던 할머니가 지금은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사용한다. 내친김에 페이스북도 시작했다. 3년 전 작고한 남편이 한때 원예업을 한다고 집 근처에 다양한 나무를 심어 놓은 것이 생활의 원천이 됐다.

매일 오전 5시면 일어나 혈압을 재고 식사를 한다. 아침 드라마까지 시청한 뒤 주문이 들어오는 8시가 되기 5분 전 태블릿 앞에 대기한다. 본인이 출하할 수 있는 주문이 있으면 ‘수락’ 버튼을 누른다. 따온 잎사귀를 예쁘게 다듬어 팩에 담고 상자에 넣어 자동차로 10분 거리의 농협 지부에 가져가 등록하면 업무 완료.

이런 할머니들을 돕는 게 고령자도 쉽게 조작할 수 있도록 개발된 ‘가미카쓰 정보 네트워크’다. 태블릿 단말기로 시장 동향이나 매출, 단가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납품 의사를 전달하는 시스템이다. 그날 출하할 잎사귀 양이나 출하처를 조정할 수 있으니 시장가격은 꽤 안정적인 편이다.

오전 11시경 찾아간 농협 출하장에는 잎사귀 상자를 실은 고령자들의 차량이 속속 도착했다. 단풍잎의 경우 10팩들이 한 상자에 3000엔을 받는다. 유통 과정을 거친 뒤 시장에서는 6000엔에 팔린다고 한다. 출하장에서 만난,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한 할아버지는 이날 9상자를 출하했다. 2만7000엔. 쏠쏠한 수입이다. 9상자라 해도 할아버지가 한 손으로 번쩍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볍다.

농협 출하장에서 각자 가져온 잎사귀들을 정리 하는 모습. 도쿠시마=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농협 출하장에서 각자 가져온 잎사귀들을 정리 하는 모습. 도쿠시마=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1986년 외지 출신 농협 직원의 아이디어로 시작한 틈새시장

현지에서 ‘이로도리(彩)’라 불리는 잎사귀 비즈니스는 1986년 외지 출신 농협 직원이 고령자와 여성도 일할 수 있는 비즈니스모델을 찾다가 발견한 틈새시장이다. 그 직원이 현재 이로도리사의 사장인 요코이시 도모지(橫石知二·60) 씨다.

그는 초창기 힘든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농협 직원이던 20대 시절, 출장 갔던 오사카의 식당에서 접시에 장식된 단풍잎을 보고 즐거워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가미카쓰정은 그해 밀감 농사를 망쳐 도탄에 빠져 있었죠. 이곳 농민들을 설득해 어렵사리 네 집이 잎사귀를 모아줬지만 출하해도 팔리지 않아 고생했습니다. 시장조사에 판로 개척 등 할 일이 많았던 거죠.”

가미가쓰 정의 ‘잎사귀 비즈니스’ 창시자 요코이시 사장. 도쿠시마=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가미가쓰 정의 ‘잎사귀 비즈니스’ 창시자 요코이시 사장. 도쿠시마=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지금 이 마을에서 생산하는 잎사귀들은 전국 시장의 70~80%를 차지한다.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우리 지역에도 잎사귀가 많다’며 시찰하러 오는 분도 많았고 시장에 뛰어드는 분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에서 (우리를) 이기지 못하는 것 같아요.”(요코이시 사장)

가미카쓰정의 무기는 이로도리사와 농협이 힘을 합쳐 수십 년간 구축한 소프트웨어다. 전국 시장과 실시간으로 연결돼 과다 출하를 막고 상품의 질을 관리한다. 이렇게 쌓은 고객과의 신뢰가 전국의 유통구조를 굳건하게 받쳐 준다.

다만 요즘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고민이다. 특히 올해처럼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해에는 다른 지역에서 출하해 주는 것이 오히려 고맙다고 말한다.

이로도리 농가의 일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주업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취미 삼아 쉬엄쉬엄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해서 마을 전체가 연간 2억6000만 엔(약 26억 원)의 매출을 올린다. 최고 연간 2000만 엔을 버는 할머니를 필두로 매일 개인당 성적표가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돼 노인들을 분발하게 한다.


●즐겁게 일하니 건강도 좋아져 마을 공영 요양원 폐쇄

노인들이 바쁘게 일하니 덩달아 건강도 좋아졌다. 마을에 있던 공영 요양원은 이용자가 줄어 아예 폐쇄됐다. 대신 사설 요양원이 몇 군데 들어섰지만 최근 10년간 1인당 의료비는 도쿠시마현 내에서 최저 수준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마을에는 신축 주택들이 들어서고 있다.

그럼에도 워낙 고령자가 많다 보니 종사자 수는 조금씩 줄고 있다. 대신 외지에서 젊은이들이 들어왔다. 햐쿠노 다이치(百野大地·33) 씨도 5년 전 두 자녀와 함께 이곳으로 이주해온 싱글파더다. 오전에는 잎사귀를 따고 오후에는 농사를 배우며 연간 200만~300만 엔 정도의 수입을 얻는다. 그는 “도시보다 이웃의 정이 남아 있고 생활비도 10분의 1 수준”이라고 자랑한다. 그처럼 외지에서 이주해오는 젊은이들은 매년 20명 선. 이들이 새로운 이주자들을 부르는 선순환이 생겨나고 있다.

이 마을은 소각 매립 쓰레기를 2020년까지 완전히 없앤다는 ‘쓰레기 0’ 운동으로도 2003년부터 전국에 유명해졌다. 마을 유일의 쓰레기 집하장에는 주민들이 직접 분류할 수 있도록 45종류로 세밀하게 분류된 바구니가 놓여 있다. 가령 투명한 유리병과 갈색 유리병은 재활용 경로가 다르니 분류부터 따로 한다. 이렇게 모인 쓰레기의 81%가 자원으로 재활용되고 있다.

●빈집 배정받으려 줄 선 이주희망자 200여 명

인접한 산간마을 가미야마(神山)정은 지역 비영리법인 ‘그린밸리’가 주도한 이주자 유치 사업이 성공하면서 낡은 민가가 속속 사무실이나 점포로 변신 중이다. 인구 5400여 명의 이 마을도 고령화율 50%에 달하는 한계마을이다.

지역민이 중심이 된 그린밸리는 2003년부터 ‘가미야마 프로젝트’를 시작해 마을의 장래에 필요한 각종 인재들을 핀포인트식으로 유치하고 정착을 지원해 왔다. 마을 곳곳에 있는 빈집을 활용하는 역발상이었다. 마을에 빵집이 필요하다면 “이 빈집은 빵집을 낼 사람에게 빌려준다”는 식이다. 현재 빈집을 소개해 달라는 이주희망자 약 200명이 줄을 서 있지만 빈집이 없어 곤란한 상황이라고 한다.

가미야마 프로젝트를 낳은 주인공 오미나미 신야(大南信也·65) 그린밸리 이사의 본업은 건설업이다. “현재 5000명인 인구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치하면 2060년에는 1100명으로 줄어든다는 예측이 나왔습니다. 이런저런 노력을 해 최근 몇 년간 연평균 24명 정도의 신규 입주자가 유입됐는데, 이 상태가 유지되면 2060년 인구는 1900명대가 됩니다. 저희는 이를 3200명으로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그러려면 매년 44명의 신규 이주자를 받아들여야 하죠.”

십수 년간 이주민 유치 사업을 주도해 온 그는 가미야마의 인구를 늘린다는 욕심은 버렸다고 말한다.

“일본 전국에서 인구가 줄고 있습니다. 이 흐름을 가미야마도 피할 수는 없죠. 대신 인구 구성의 질을 좋게 하자. 그래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마을을 유지하자는 게 저희 목표입니다.”

그는 이 같은 노력을 ‘창조적 인구 감소’를 추구한다고 표현했다.

도쿄에 본사를 둔 플랫이즈의 가미야마 사무실. 도쿠시마=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도쿄에 본사를 둔 플랫이즈의 가미야마 사무실. 도쿠시마=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인구는 줄더라도 질을 좋게…창조적 인구 감소

2012년 20년간 방치됐던 양조장을 개조해 위성사무실과 아카이브를 만든 디지털 영상업체 플랫 이즈의 스미타 데쓰(隅田徹·56) 대표이사는 직원 16명과 함께 이곳에서 일한다. 도쿄 시부야 사무실의 지부처럼 시작했던 가미야마 사무실의 환경에 매료돼 아예 거주지를 이곳으로 옮겼다. 그는 “시부야에서 일하건 가미야마에서 일하건 급여도 직책도 똑같다”며 “정보화 시대에 반드시 같은 사무실에 있어야 일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도쿠시마의 인터넷 속도는 도쿄나 오사카보다 훨씬 빠르다고 한다. ‘공공사업의 실수’로 지나치게 좋은 선이 깔렸기 때문이라는 것. 그가 소장한 디지털 영화만 수십만 본이다. 몇 년 전 지인들끼리 즐기려 시작한 영화제가 해를 거듭할수록 커지고 있다. 올해는 초등학교 옛 교사를 빌려 수십 편의 영화를 상영했다.

옛민가를 개조해 웹 디자인 사무실로 만든 키네토스코프. 도쿠시마=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옛민가를 개조해 웹 디자인 사무실로 만든 키네토스코프. 도쿠시마=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6년 전 가미야마의 옛 민가를 개조해 웹 디자인 회사 ‘키네토스코프’사를 설립한 히로세 기요하루(廣瀨圭治·46) 대표는 지역특산품을 창출하며 적극적인 지역공헌에 나선 사례다. 가미야마에 지천인 삼나무를 이용한 용기 제작으로 지역의 이름을 알리고 있다. 그가 삼나무를 깎아 만든 나무 컵은 1개 1만3000엔으로 고가지만 해외시장에서 호평을 받으며 불티나게 팔려 나간다. 지난해부터 장인을 고용해 공방을 만들고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그는 대도시인 오사카에서 10년 넘게 일해 왔지만 가미야마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도시에서는 미친 듯이 일하고 돈을 벌고 나면 휴식도 오락도 그 돈으로 해결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돈이 없이도 자연과 인정 속에서 쉬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이주민이 들어오니 빵집도, 식당도, 게스트하우스도 생겼다

가미야마정에는 현재 정보기술(IT)기업 16개사가 위성사무실을 설치했다. 전입자가 조금씩 늘어나더니 2011년엔 사상 처음으로 전입자 수가 전출자 수를 넘어서기도 했다. 이주자가 늘면서 마을에 없던 음식점이나 카페, 게스트하우스 등이 생겨나 외부로부터 손님을 부르는 선순환이 이뤄지고 있다. 최근에는 아일랜드인이 이주해와 유럽풍 수제 맥주 공방을 열었다.

‘미래는 지방으로부터 온다.’ 일본에서 지방 활성화를 논할 때 많이 거론되는 말이다. 이 말대로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소멸 위기에 처했던 두 마을은 밖으로부터의 도움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미래를 열어 나가고 있었다.

도쿠시마=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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