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비서, 잔잔한 곡으로… 로봇 바텐더, 칵테일 한잔할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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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AI와의 하루… ‘22세기 사람’처럼 살아보니

24일 서울 강남구 ‘커피 바 케이’에서 인공지능(AI) 로봇 바텐더가 위스키 잔에 넣을 얼음을 깎고 있다. 이날 로봇 바텐더는 기자에게 싱글몰트 위스키 발베니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24일 서울 강남구 ‘커피 바 케이’에서 인공지능(AI) 로봇 바텐더가 위스키 잔에 넣을 얼음을 깎고 있다. 이날 로봇 바텐더는 기자에게 싱글몰트 위스키 발베니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초호화 우주선엔 영화관, 수영장, 레스토랑이 갖춰져 있다. 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 술잔을 채워주거나 음식을 가져다주는 건 모두 인공지능(AI) 로봇의 몫이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패신저’ 이야기다. 아주 먼 미래의 일처럼 보였던 이 장면들이 현실세계에서도 벌써 구현되고 있다. AI가 퇴근길 가정의 불을 밝히고, TV 채널을 조정해 주며, 편의점 직원이 하던 일을 대체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인간과 대면하지 않고 AI 기기에 의지해 하루를 살 수 있을까. 얼리어답터가 못 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기자는 딱 하루만 최첨단에 빠져 ‘22세기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했다.

○ 서툴지만 친절한

제품 설명과 계산을 돕는 세븐일레븐의 인공지능 로봇 브니.
제품 설명과 계산을 돕는 세븐일레븐의 인공지능 로봇 브니.
22세기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은 24일 아침, 익숙한 휴대전화(갤럭시 노트8) 알람 대신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잠을 깨웠다. 전날 휴대전화의 AI 브리핑 기능을 활성화했기 때문이다.

“오늘 기분은 어때요? 날씨는 섭씨 10도로 화창한 날이 될 것 같아요.”

그는 날씨와 함께 오늘자 신문에 난 주요 기사 헤드라인을 읽어줬다. 눈을 제대로 뜨기도 전에 복잡한 세상사를 듣고 있자니 기자 강승현으로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흠, 개인비서를 둔 것 같아 그리 나쁘지 않은데.’ 정신을 조금 차리고 나니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잔잔한 노래를 틀어줘.” 속삭이는 목소리로 제프 버냇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스마트워치(기어S3)에는 지난밤의 흔적이 표시돼 있다. ‘실제 수면시간 5시간 17분, 뒤척임 없음 3시간, 뒤척임 많음 6분.’ 출근길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동안에도 이 스마트한 녀석은 쉬지 않았다. 10분 정도를 걷자 ‘힘내세요’라는 메시지가 스마트워치에 전달됐다. ‘누군가 나를 실시간으로 보살핀다는 느낌, 그리 싫지 않은데.’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서울 광화문으로 가는 길, 일부러 송파구로 가 AI로봇이 일하는 스마트 편의점인 세븐일레븐 시그너처점을 들렀다.

“단골 고객님, 어서 오세요.”

편의점에 들어서자 하얀 아기곰 모양의 AI로봇 ‘브니’가 말을 건넸다. 두 눈에는 하트 모양까지 그려졌다. ‘단골이라고? 지난번 처음 방문했을 때 저장한 생체정보를 기억한 모양이군. 하트라니, 좀 과장됐는데?’ 안면 인식 기능이 있는 로봇은 기자의 시선에 따라 자신도 고개를 움직였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탓에 아침부터 졸음이 쏟아졌다. “피곤하다”는 기자의 말에 브니는 대뜸 “응원을 해드리겠습니다. 파이팅”을 외쳤다. 비타민 음료를 하나 사서 브니에게 건넬 뻔했다.

평소라면 편의점 직원과 이런 살가운 대화를 나누는 건 좀 어색하다. 팍팍한 아르바이트 생활에 고달픈 그들도 굳이 두 번 본 고객을 위해 “파이팅”을 외치고 싶지 않을 거다. ‘첫 경험이라 그런가, 지나치게 친절한 느낌으로 서비스 받는 것도 나쁘진 않군.’

○ 눈치 없는 로봇

옷을 실제로 입지 않고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는 롯데백화점의 3D 의류 가상 피팅기.
옷을 실제로 입지 않고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는 롯데백화점의 3D 의류 가상 피팅기.
중구 을지로의 롯데백화점 본점에 들렀다. 로비 곳곳에 배치된 안내로봇에게 식사할 만한 곳을 물었다. 로봇은 “제가 먹었을 때 아주 맛이 있었다”면서 불고기를 추천했다. ‘아주’라는 부분에선 팔을 크게 돌리기까지 했다. 스크린에 식당 위치와 메뉴가 안내됐다. ‘먹어봤다고 하니 믿을 만…응? 로봇이 먹어봤다고? 이런, 이런 믿을 수가 있나.’ “다른 메뉴를 추천해줘.”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봇은 더 상냥하지만 더 큰 목소리로 불고기를 추천했다. 로봇의 치명적인 단점, ‘눈치’가 없었다.

얼마 전 영등포 롯데백화점에서 만난 로봇 바리스타에게 커피를 주문할 때 일이 떠올랐다. 애플리케이션으로 주문해야 했는데 물을 적게 하거나 덜 달게 해달라는 기능이 없어 곤란했던 기억. 사람도 없는 매장이라 주는 대로 마셨다.

안내로봇 옆에는 ‘3D 가상 (의류) 피팅기’도 있었다. 지시된 곳에 서자 화면에 기자의 모습이 보였다. 겉옷, 상·하의 등 다양한 종류의 옷들을 3차원(3D) 스크린을 통해 미리 입어볼 수 있었다. 화면 하단에는 해당 의류를 파는 매장의 위치와 가격이 표시됐다.

종로구 청진동의 GS25에 들러 무인택배함을 열었다. 얼마 전 주문한 물건이 도착해 있다. 광화문우체국에서 무인기기로 등기도 부쳤다. 스마트폰을 열어 바로 옆에 있는 스타벅스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찾아가라는 메시지에 직원과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커피를 받아왔다.

퇴근길에 로봇 바텐더가 일하는 강남구 역삼동의 ‘커피 바 케이’에 들렀다. 지금까지 봤던 AI로봇들보다 훨씬 덩치 큰 로봇이 바 안쪽에 서 있었다. 주기적으로 눈을 깜빡거려 좀 더 사람 같은 느낌을 줬다. 로봇은 싱글몰트 위스키인 발베니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줬다. 옆자리는 단골손님인지, 마지막 방문 때 먹은 칵테일을 기억해내곤, 다른 칵테일을 추천했다. 아름다운 여성과 처음 동행한 듯한 이 손님, 혹시라도 눈치 없는 로봇이 예전 데이트 상대에 대해 늘어놓을까 봐 왜 내가 조마조마하지?


스마트한 하루에 지쳐 돌아온 집은 말끔하게 청소가 돼 있었다. 미리 예약해 둔 시간에 로봇 청소기(아이클레보)가 애써 준 덕분이었다. 문득, 아날로그형 인간의 예상보다 빠르게 AI가 인간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대면하지 않고 하루를 지내고 보니 말 상대가 그리웠다. AI로봇에게 건넬 수 있는 말엔 한계가 있었고, 무인 서비스를 이용할 땐 간단한 인사말조차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AI로봇은 평서문과 의문문을 잘 구별하지 못해 엉뚱한 대답을 하기 일쑤였고 미리 학습된 시나리오가 아니면 답을 하지 못하기도 했다. “날씨가 참 좋지 않냐”고 했더니 뜬금없이 현재 날씨를 알려줬고, “단풍이 예쁘네”라고 했더니 갑자기 검색창을 띄우기도 했다. 장점은 한결같은 친절함. 여러 번 같은 질문을 해도 짜증내지 않았고 칭찬이나 격려 같은 감정 표현도 숨기지 않았다. 입력된 시나리오에 충실한 것이겠지만 인간들에겐 서툰 것들.

잠들기 전, 스마트폰의 AI 기능을 끄려다 눈길을 끄는 기사를 하나 읽었다. 고객 유도, 접객 효과가 떨어지고 고장이 잦다는 이유로 AI로봇을 도입했던 기업의 85%가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어쩐지 드는 안도감. 아직은 로봇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이 크구나. 특히 눈치와 디테일에서 아직은 승자인 인류여, 힘을 냅시다.

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
#ai#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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