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무관심한 일상이 만든 위태로운 평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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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정이현 지음/168쪽·1만1200원·현대문학

“세영은 남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손톱의 때만큼도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여기서는. 학폭위(학교폭력위원회)에 회부된 아이들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아이들이었다. 이 동네는 도심이지만 어떤 의미에선 지방의 소읍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등을 맞대고 붙어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둘러싼 대단지 아파트. 1기 신도시 시범단지에 살면서 “재건축되면 어쩌려고”를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주민들. 이곳에서 5년째 동네 약국을 운영 중인 세영은 죽음도 두렵지 않을 만큼 별 흥미롭지 않은 인생을 산다. 그는 중학생인 딸 도우가 학급 임원이 되면서 학부모회 부회장이 되지만, 학폭위에 참여하는 것은 망설여진다. 주거라는 목적에 묶여 “마을공동체 폐쇄성을 답습”하고 있는 동네에서, 듣지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처럼 사는 일이 습관처럼 굳어져 버린 탓이다.

행동하지 않고 ‘도피’하는 것으로 문제를 외면하는 세영처럼 남편 무원은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가상세계로 도망친다. 데면데면한 결혼생활과 불확실한 대학 강사라는 커리어를 피해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지방의 호텔을 경영하고 있는 그는 자영업자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뿐이다.

결국 학교와 어른들은 최근 발생한 폭력사건의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한다. 입을 맞춘 것처럼 똑같은 가해자 학생 둘의 진술서는 누가 봐도 의심스럽다. 그렇지만 우악스러운 말씨에 문신까지 있는 할아버지, 그리고 촌스러운 패션의 할머니와 사는 피해자의 편을 들기는 더 어렵기만 하다.

한국 사회 중산층 가정의 정신적 퇴행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세영과 무원, 도우가 자신의 자아를 마주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피해자 학생의 장례식장에 간 도우를 데리러 갔던 세영은 마침내 자신도 ‘여기 꿇어앉아 울고 싶다’고 고백한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간구하는 밤이 언젠가 올 것”이라면서.
 
조윤경 기자 yunique@donga.com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정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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