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포도나무 아래서]〈12〉위층 한국 라디오, 아래층 프랑스 라디오
더보기

[포도나무 아래서]〈12〉위층 한국 라디오, 아래층 프랑스 라디오

신이현 작가입력 2018-10-02 03:00수정 2018-10-02 18:10
뉴스듣기프린트
트랜드뉴스 보기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사셨다고요? 그런데 사투리를 굉장히 쓰시네요.”

한국에 정착한 뒤 곧잘 듣게 되는 말이다. 프랑스에 살다 오면 다들 프랑스 배우처럼 입고 표준어를 쓰는 세련된 여성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파리에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 오래 산 사람들일수록 그들 고향 말을 많이 쓴다. 한국어를 들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개인의 언어는 한국 표준어가 아닌 태초의 언어로 돌아간다. 패션 감각 또한 고국을 떠날 때 가장 유행하던 차림을 계속 유지한다. 그래서 외국에 오래 산 사람일수록 촌스러운 경향이 있다. 특히 온갖 나라 사람이 다 모인 파리는 한물간 옷을 입고 각자의 고향 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국제적으로 촌놈들이 모여 그것이 개성이 된 도시다.

“넌 한국말 할 때는 딴 사람 같아. 프랑스어를 할 때와는 너무 달라. 프랑스어를 할 때는 목소리가 낮고 차분하면서 부드러워. 그런데 한국어를 시작하면 톤이 높고 빨라지면서 엄청 시끄러워. 같은 사람 같지가 않단 말이야.”

레돔은 내가 한국말을 할 때마다 신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어는 낯선 언어이기 때문에 말할 때 늘 조심스럽다. ‘아, 이 프랑스어는 정말 엉터리인데.’ 말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지막하고 조신한 게 버릇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말을 할 때는 말 그대로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다. 특히 고향 친구를 만나면 하늘이라도 찌를 듯 등등해진다.

주요기사

의사를 전달하는 것만이 언어의 목적은 아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냥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프랑스어로는 내 맘대로 까불 수가 없으니 물고기는 늘 헐떡거리며 목이 말랐다. 프랑스가 아무리 좋다 해도 한국이 아무리 살기 힘들다 해도 이곳에 돌아오고 싶었던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모국어를 다시 찾아 그 강에서 헤엄치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레돔이었다. 한국에 온 뒤 그와 나는 반대의 처지가 되었다. 우리가 사는 충주 땅에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은 몇 명일까? 어딘가 두 명쯤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있잖아. 어제 꿈속에서 100km를 걸어갔어. 왜 걷는지도 모르겠고 계속 걷다가 누구를 만났는데 뭘 했는지 알아? 프랑스어를 했어. 실컷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해가 떴어.”

“이런, 나랑 하면 되잖아. 꿈속에서 프랑스어라니 너무 가엾다.”

나의 대답에 그는 으쓱하며 요즘 내 프랑스어가 너무 엉망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대화 문장도 반 토막에서 끝내버린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나는 요즘 집중해서 들어야 하고 문장을 말할 때는 머리를 써야 하는 프랑스어 말하기가 귀찮아져 버렸다. 그는 사랑이 식어버려서 그렇다 하고, 나는 늙어서 그렇다고 한다. 사실은 둘 다인 것 같다.

고독한 레돔을 위해 텔레비전에 프랑스 채널 케이블을 깔았다. 그는 아주 행복해했다. 매일 저녁 프랑스 채널만 본다. 그 때문에 나는 8시 뉴스를 볼 수가 없다. 채널권을 너만 가지냐고 따질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요즘 핫하다는 드라마나 연예 프로그램도 모른다. 매일 저녁 프랑스 텔레비전을 보면서 프랑스 뉴스를 듣고 프랑스 영화를 본다. 반쯤은 프랑스에 살고 있는 셈이 되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거실에 나와서 한국 라디오를 켜고 아침 준비를 한다. 뒤늦게 나오는 그는 프랑스 라디오를 들으며 거실로 나온다. 둘 중의 하나는 꺼야 한다. 한국 라디오를 끈다. 밭에서도 그는 프랑스 라디오를 듣는다. 나는 내 라디오를 듣는다. 가까이서 일할 때는 둘 중 하나를 꺼야 한다. 내 라디오를 끈다. 작업실에서도 우리는 라디오를 듣는다. 위층에서는 한국 라디오, 아래층에서는 프랑스 라디오, 둘이 만나면 내 라디오를 끈다. 여긴 한국이니까. 아무 불만 없다. 그가 100km를 걸어 프랑스어를 말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꿈을 꾸지 않는다면.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라디오#프랑스어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주요뉴스

1/3이전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