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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 칼럼]남북정상회담, 그 至上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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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 칼럼]남북정상회담, 그 至上의 유혹

박제균 논설실장 입력 2018-09-17 03:00수정 2018-09-17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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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대통령에 정상회담 최고봉은 南北… 집념 남다른 文, 1년 반 안돼 3번째
北엔 ‘정상회담=대규모 지원’… 비핵화 없인 지원不可 구조 고착
이번 회담 성패도 美판단에 좌우… 文, 받아들여야 할 ‘불편한 진실’
박제균 논설실장
전직 외교부 장관의 얘기. “장관이 돼서 가장 큰 성취감을 느끼는 순간 중 하나는 외국에 나가서 회담을 하거나 정상을 만날 때다. 한국에서야 장관 중 한 명이지만, 외국에선 외교장관에 대한 예우가 특별하다. 붉은 카펫을 밟으며 국빈급 의전을 받은 경험은 오래도록 남는다.” 전직 국무총리로부터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여기서야 방탄 총리니 뭐니 하면서 국회에서 시달리고, 대통령 그늘에 가리지만 외국 가면 다르다. ‘프라임 미니스터(Prime Minister)’가 실질적인 국가수반인 나라가 많아 의장대 사열하고 예포까지 쏘는 등 정상급 의전을 받아보면….”

외교장관과 총리가 이럴진대 대통령은 어떨까. 역대 대통령들이, 특히 임기 후반부 레임덕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기에 골치 아픈 국내를 떠나 외유나 순방을 선호했던 데는 그런 심리적 이유도 깔려 있다. 이런 한국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의 최고봉은 단연 남북 정상회담이다. 우선 그 기회의 희소성에서 다른 정상회담과는 비교가 안 된다. 더욱이 회담 성과에 따라 일거에 한반도 평화를 가져올 거란 기대(혹은 착각) 때문에 대통령에게는 최고의 유혹이었다.

그중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의 집념은 남다르다. 나는 지난해 6월 26일자 본란(本欄)에 이렇게 썼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은 일종의 유업(遺業)이다. … 10·4선언이 정권 말 합의여서 무위로 돌아간 만큼 정권 초 정상회담을 열어 이를 부활시키고 임기 내에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것이다.” 예상대로 그는 집권 1년도 안 돼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1년 반도 안 돼 벌써 세 번째 회담이다.

문제는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에 끌리는 한국 대통령의 심리, 특히 문 대통령의 애착을 너무 잘 안다는 점이다. 정상회담을 남측에서 돈 받을 기회로 여기는 북한에 대북 지원사업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10·4선언은 아버지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남겨준 수십조 원짜리 채권증서나 다름없다. 2007년 정상회담의 준비위원장을 지낸 문 대통령은 북한이 내심 뭘 원하는지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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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이 전부터 ‘남북합의의 법제화’를 주장한 것도 김정은에게는 채무를 이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비쳤을 수 있다. 여야가 판문점선언 비준동의 문제 논의를 정상회담 이후로 연기했음에도 청와대가 굳이 11일 비준동의서를 국회로 송부한 것도 비슷한 이유로 보인다. 판문점선언은 ‘10·4선언에서 합의된 사업들을 적극 추진해 나간다’고 명기했다. 특히 내년에만 4712억 원을 잡은 비용추계서까지 첨부한 것은 돈 문제를 유념하고 있음을 보여줘 김정은의 신뢰를 높이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수십조, 아니 수백조 원을 쓰더라도 핵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다면 아깝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남측이 북에 돈을 쓰려야 쓸 수 없는 구조가 고착됐다. 미국과 유엔의 대북 제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대북 지원을 봉쇄하고 있다. 그러니, 이번 회담에 아무리 통 큰 대북 지원 합의를 한다고 해도 북한 입장에선 까딱 잘못되면 공수표가 될 약속어음인 셈이다.

북한이 노무현의 약속과 문재인의 이행을 현금화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다. 말이나 ‘쇼’가 아닌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다. 김정은은 물론이고 심지어 문 대통령까지 미국이 먼저 종전선언에 합의해줘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누군가. 문 대통령이 아무리 설득해도 중간선거를 앞둔 그가 “얻은 것도 없이 선물을 안겨줬다”는 평가가 불러올 리스크를 감수할 리 없다. 따라서 문 대통령이 할 일은 트럼프가 아니라 김정은을 설득하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에 끌려도 상응하는 성과를 낸다면 문제 삼을 국민은 없다. 하지만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례에서 보듯, 치명적 유혹은 화려한 말의 잔치로만 남았다. 두 대통령이 남북 화해에 집착한 나머지 등 뒤에서 한반도 체스판을 움직이는 미국의 존재를 간과했거나 애써 무시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회담의 성패도 미국의 판단이 좌지우지할 것이다. 문 대통령으로선 마주 앉은 김정은뿐 아니라 태평양 너머 트럼프도 의식하며 회담을 진행해야 한다. 그것이 평양에 가는 문 대통령이 받아들여야 할 불편한 진실이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
#남북 정상회담#문재인 대통령#비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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