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석호]통계로부터 배우는 겸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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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확률로 설문대상자 추출하고 응답자 충실히 답변할 때 좋은자료 나와
원칙 제대로 지키지 않은 자료 만들고 숫자 앞세워
합리적 비판 막는 일 없어야… 부실 통계에 기반한 정책은 손실로 이어져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경기 안산공단의 1996년 3월은 무척 추웠다.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교수님의 연구실에 처음 찾아갔을 때, 책상 위에는 안산의 공단 지도와 업체 현황,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정보가 있었다.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선을 그어 공단을 200개 구역으로 나누고, 1부터 200까지 일련번호를 써 놓았다. 사각형 또는 오각형의 구역 위에는 또 다른 숫자도 있었는데 각 구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수였다. 교수님은 200개 중에서 20개 구역을 무작위로 뽑더니 여기에 있는 업체들을 방문해 조사할 거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 이 작업이 얼마나 고되고 서러운 여정이 될지 알지 못했다. 나는 문전박대를 수시로 당하면서 공단의 꽃샘추위를 유난히 시리게 느껴야 했다. 교수님은 20개 구역에서 일하는 사람들만을 조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다. 나는 지난 20여 년을 교수님과 함께하면서 그 당부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으며, 결국 이 당부는 통계와 자료 분석을 통해 세상 읽기를 시도하는 내 학문 세계의 핵심적 정체성이 되었다.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 정책의 고용과 소득에 대한 파급효과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 통계의 품질과 왜곡 논란으로 확대되고, 통계청장이 교체되면서 소란은 지속되고 있다. 그래도 나는 장하성 대통령정책실장이 가계소득에 대한 최저임금의 부정적 효과가 잘못된 표본설계로 인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반갑다. 소득이 매우 높거나 낮은 지역의 응답률이 낮기 때문에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강신욱 통계청장의 고백도 고맙다. 정부가 수집하고 활용한 표본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정부 고위관계자의 입을 통해 듣는 것만으로도 신선하다.

나는 오래전부터 부실한 통계에 기반한 정책이 막대한 국가적 손실로 이어진다고 경고해왔지만, 그간 정부는 귀를 닫고 있었다. 최저임금 통계 논쟁에서 등장하는 가계동향조사나 지역별 고용조사도 조사 과정이나 응답률 계산 방식에 대해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전문성 있는 통계청이 수집했으니 믿으라는 식이다. 이는 자료를 부실하게 수집했거나 공개하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의심을 살 만하다. 나는 이번 논쟁을 계기로 대규모 자료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통계청을 포함한 정부 부처가 귀를 열고 무오류의 오만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원칙을 지킨 자료는 못 내놓으면서 숫자를 앞세워 합리적 비판의 입을 막는 일도 없었으면 한다.

좋은 통계를 구축하는 데 합당한 예산을 지출하지 않고 조사단가를 조금 절약한 걸 성과 평가에 반영하는 우매한 짓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한다. 한국의 조사단가는 조사 선진국과 비교해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업계 입장에서는 정부의 예산에 맞춰 부실한 자료라도 생산해야 하고 그럴수록 우리의 손에 있는 통계는 실제와 멀어진다. 국내외 학자들이 자료의 품질에 대한 의구심 없이 사용하는 유일한 자료인 성균관대 한국종합사회조사조차도 한국연구재단이 비싸다는 이유로 지원을 중단하면서 예산 확보 문제로 애를 먹는다. 좋은 조사자료의 소중함에 대한 무지가 불러온 비극이다.

통계 작성을 위한 제도적 수단과 재원을 독점하고 있는 정치인과 관료의 욕망이 업계의 관행으로 관철되면서 조사 분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침묵은 일상에서 저질러지는 평범한 악이 되었다. 조사 대상에 속한 사람들이 뽑힐 확률을 동일하게 만들어 표본을 추출하고 대체하지 않고 그 표본만을 끈질기게 설득할 때 좋은 자료를 얻는다는 선생님의 당부는 조사방법론 교과서의 첫 장에 나오는 규범이다. 장하성 정책실장과 강신욱 통계청장의 조사 표본에 대한 지적이 학계의 비판을 빌려 정쟁에서 빠져나오려는 변명이 아니길 바란다. 이번에야말로 통계를 제대로 구축하겠다는 실천 약속이었으면 한다.

사회 현상이 숫자로 표현되는 순간부터 이는 현실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하지만 낮은 비용으로 원칙 없이 구축된 지표는 권력의 거짓말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뿐이다. 내가 자료의 구축과 분석의 매력에 빠지는 이유는 통계가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내 손에 있는 통계가 가진 한계를 알고 겸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학 생활 중 방학에 귀국했을 때 조사가 더딘 지역의 응답률을 높여 달라고 거리낌 없이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야속하다가도, 강원도 농촌 할머니의 밭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서 시원한 음료수가 미지근해질까 봐 조바심을 내던 선생님의 진정성에 감동하곤 했다. 이상한 응답이 있으면 그게 어디든 다시 찾아가 확인했던 선생님의 집요함과 겸손함이 정쟁으로 치닫는 오늘의 통계 논쟁을 보면서 몹시 그리워진다.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통계#소득주도성장#최저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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