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리의 듀얼인터뷰] 첫사랑 연대기 만든 40대 두 남자

  • 스포츠동아
  • 입력 2018년 8월 31일 06시 57분


영화 ‘너의 결혼식’을 함께 완성한 이석근 감독(오른쪽)과 제작자 김정민 대표. 2012년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이 5년여 준비 끝에 내놓은 영화는 2주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첫 작업에서 시너지를 발휘한 두 사람은 다음 영화도 함께 구상하고 있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영화 ‘너의 결혼식’을 함께 완성한 이석근 감독(오른쪽)과 제작자 김정민 대표. 2012년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이 5년여 준비 끝에 내놓은 영화는 2주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첫 작업에서 시너지를 발휘한 두 사람은 다음 영화도 함께 구상하고 있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김정민 대표
남자가 바라보는 첫사랑…성공하리라 확신
류승완 감독 다음으로 인정한 ‘최고 성실맨’
이 감독님, 간만에 해피한 명절 보내겠어요

이석근 감독
시나리오 썼더니 ‘건축학개론’ 대박 나 당황
버린 이야기 수두룩, 이 작품만은 놓지 못해
첫사랑 떠올랐다는 아내…마냥 웃지 못했죠


재미있는 영화를 발견해내는 관객의 ‘눈’은 역시 예리하다. 박보영·김영광 주연의 ‘너의 결혼식’이 늦여름 극장가에서 잔잔한 돌풍을 만드는 지금 상황만 봐도 그렇다. 빅시즌으로 통하는 8월 중순 개봉작으로 ‘등판’할 때만해도 상영관을 선점한 여타 대작들에 밀리지 않을까 예측된 게 사실. 로맨스 장르인데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인 점도 이런 예상을 부추겼다.

섣부른 전망은 빗나갔다. 22일 개봉 당일부터 상영 2주째로 접어든 30일까지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고,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이 더 늘고 있다. 19살에 만난 두 주인공 환승희(박보영)와 황우연(김영광)의 13년에 걸친 첫사랑 연대기가 관객의 감성을 파고들면서 공감을 얻은 결과다.

풋풋하고 달달하면서도 애틋한 로맨스 영화의 흥행을 이끈 주역은, 뜻밖에도 40대 중반의 남자들. 이석근(47) 감독과 제작사 필름케이의 김정민(44) 대표다. 얼핏 액션이나 스릴러 영화에 더 어울릴 것 같은 감독과 제작자는 5년의 시간을 쏟아 부어 섬세하면서도 현실 감각을 놓치지 않은 첫사랑 스토리를 완성했다.

두 사람을 만난 날은 마침 ‘너의 결혼식’의 100만 돌파 소식이 전해진 직후다. “오랜만에 푹 잤다”고 입을 모았지만 아직 안도하긴 이르다. 제작비를 회수하는 손익분기점(150만)까지는 긴장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곧바로 낭보는 이어졌다. 31일 밤 영화의 손익분기점 돌파가 확실시되는 상황. 입소문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 10년 넘게 ‘데뷔’ 준비한 감독과 베테랑 제작자의 만남

이석근 감독은 늦깎이 신인이다. 요즘은 30대 초반에 장편 데뷔작을 발표하는 신인감독이 많지만 그는 40대 후반에 첫 연출작을 내놓았다. 영화감독이 되려고 준비한 시간만 15년이다.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는지 굳이 듣지 않아도 그간의 ‘고생’은 짐작되고도 남는 시간이다.

“시나리오 쓰고 수정하다보면 2, 3년은 훌쩍 지난다. 몇몇 영화사에 적을 두고 작업을 해왔지만 촬영 직전 중단되기도 했고, 내 시나리오와 비슷한 작품이 개봉하기도 했다. 그럴 땐 상처가 컸다. 어디에도 몸담지 않고 2, 3년 동안 카페와 도서관에서 매일매일 시나리오를 썼다. 오전과 오후에 각각 다른 시나리오를 쓰면서 말이다.”

이석근 감독은 군 제대 후 복학하지 않고 영국 런던으로 어학연수를 떠났고 그때 영화에 빠졌다. 방송학 전공으로 현지 대학에 진학해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에서 영화감독의 꿈이 출발했다. 이후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귀국해 영화감독을 본격 준비하기 시작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순간으로 돌아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걸 알게 된다면 겁이 날 것 같다. 영화 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히 고민할 거다. 하하! ‘너의 결혼식’을 써놓은 뒤에도 첫사랑 영화인 ‘건축학개론’이 나왔다. 엎어야 하나 싶었지. 뭐, 한국은행 터는 영화는 두 번 못해도 첫사랑 이야기는 또 나와도 되지 않나.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자칫 세상의 빛을 못 볼 뻔한 영화는 김정민 대표와 만나 동력을 얻었다. 1300만 흥행작 ‘베테랑’과 대작 ‘군함도’를 공동 기획하고 제작한 실력있는 제작자다.

김정민 대표는 “남자가 바라보는 첫사랑, 연인 혹은 연애의 감정을 담은 시나리오가 나를 건드렸다”며 “‘딱 내 이야기야’라곤 못해도, 시나리오에서 확 다가오는 감정이 있었고 분명 관객도 느끼리라 확신했다”고 돌이켰다.

영화 ‘너의 결혼식’의 한 장면. 사진제공|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영화 ‘너의 결혼식’의 한 장면. 사진제공|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너의 결혼식’의 잔잔한 흥행이 더 돋보이는 이유는 그 장르가 로맨스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계가 액션이나 스릴러, 사극, 시대극 등에 치중한 나머지 오랜 기간 외면되어온 바로 그 장르다. 멜로와 로맨스 영화가 ‘기근’이라 할 만큼 제작시도 자체가 줄어든 상황에 ‘너의 결혼식’을 선택한 건 그 자체로 도전이었다. 이 부분에는 김정민 대표의 ‘뚝심’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뭐가 됐든 희소성이 있으면 살아남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간 참여한 영화도 그렇지만 남자 형님들이 휩쓰는 이야기가 많았고, 꽤 오랫동안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로맨스와 휴먼, 코미디는 상대적으로 죽었다. 이 타이밍에 ‘너의 결혼식’이 될 것 같았고,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김정민 대표가 영화계에 입문한 때는 1997년. 제대하자마자,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영화 현장부터 찾았다. 연출부 막내로 첫 경험한 영화가 1998년 최민수 주연의 ‘남자 이야기’다. 이후 ‘아라한 장풍대작전’과 ‘친절한 금자씨’의 제작실장, ‘짝패’와 ‘해결사’의 각본과 프로듀서로 활동 폭을 넓혔다. 경력의 절반 정도가 류승완 감독과의 합작이다.

“지금까지 성실한 영화감독을 딱 두 명 봤다. 류승완 감독과 이석근 감독. 엄청나게 성실하다. 두 분 다 계속 뭔가를 쓴다. 이석근 감독님은 연출부 같은 경험이 없다보니 모든 과정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믿기지 않을 만큼 흡수가 빨랐다. 내 소신 중 하나는, 영화는 사람이 만든다는 거다. 그런 면에서 감독님은 현장 모든 스태프, 배우까지 전부 챙겼다.”

● 지금은 웃지만 돌아보면 고비의 연속

‘너의 결혼식’은 손익분기점을 넘고, 9월에 접어들어서도 인기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감독도, 제작자도, 배우도, 배급사도, 모두가 웃는 상황. 하지만 돌아보면 위기와 고비도 상당했다. 그 고비를 헤쳐 나가는 책임은 제작자의 몫. 김정민 대표는 “고지가 눈앞에 있는데 투자사들은 좀 더 센 남자배우를 원했고, 센 배우들은 액션이나 스릴러를 원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오래 방황했다”고 털어놨다.

그 과정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킨 이는 주인공 박보영. 시나리오를 읽고 출연을 약속했지만 투자와 상배배우 캐스팅이 난항을 겪는 과정에서 박보영은 2년 넘게 자리를 지켰다.

어려움 속에서도 이석근 감독은 ‘너의 결혼식’을 놓지 않았다. 어쩌면 놓지 못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동안 썼다가 버린 이야기가 아주 많다. ‘너의 결혼식’은 어떻게 보면 나에게 첫사랑 같다. 버스에서 ‘환승입니다’라는 멘트를 들을 때마다, 아…, 환승희(여주인공 이름)를 빨리 끝내야 하는데. 잊혀지지 않았다.”

영화는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말한다. 사랑한 경험이 한 번쯤 있다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명제다. 자신이 겪거나 포착한 일상의 한 장면, 주변 친구들이 겪은 사랑이야기를 빠짐없이 기억해 시나리오에 녹여낸, 감독이 내린 ‘사랑의 결론’이다.

“지금 나도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만약 고등학생 때 아내를 만났다면 결혼까지 할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결혼할 수 있는 타이밍에 만난 게 중요하니까.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기준이 결혼에 맞춰져서 그런 게 아닐까도 싶다. 내가 사랑을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웃음), 첫사랑은 미숙할 때 하는 사랑인 것 같다.”

그의 사랑론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모든 범죄는 단서를 남기고, 모든 사랑은 흔적을 남긴다고 하지 않나. 내 안에 쌓인 수많은 인연이나 직관적 경험이 영화에 담긴 것 같다. 나이가 좀 들고 보니 깨끗하게 이별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배우들도 전부 공감해줬고 그렇게 영화에 담아줬다.”

영화 ‘너의 결혼식’의 이석근 감독(오른쪽)과 제작자 김정민 대표.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영화 ‘너의 결혼식’의 이석근 감독(오른쪽)과 제작자 김정민 대표.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이석근 감독은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을 둔 아빠다. ‘너의 결혼식’ 영화화가 결정됐을 때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은 어느덧 5학년. 누구보다 아내의 든든한 응원은 지금의 그를 있게 한 힘이다.

“후반작업 할 때 노트북으로 아내에게 영화를 먼저 보여줬더니 ‘첫사랑이 생각난다’고 하더라. 아…, 그 반응을 좋아해야 할지, 누굴 생각한 건지. 당황했다. 하하! 10년 넘게 영화를 준비하면서 굉장히 힘들었다. ‘영화는 너의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는, 나를 아껴주는 모든 사람들과 싸워 이겼다. 단 한 번도 내게 싸움을 걸지 않은 사람이 바로 아내다.”

이석근 감독이 늘 “진단과 처방이 적확한 제작자”로 소개하는 김정민 대표는 10년여 동안 여러 영화의 공동제작에 참여해왔지만, 이번 ‘너의 결혼식’을 자신의 영화사 필름케이의 “창립작”이라고 설명한다. 이유가 있다.

“류승완 감독님의 영화사 외유내강과 작업을 하고 있지만 필름케이는 다른 레이블이라고 생각한다. 필름케이에선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들, 휴먼이나 멜로, 로맨스 쪽으로 가보고 싶다. 내 판단 기준은 단순하다. 재미가 있나 없나, 의미가 있나 없나이다. 재미도 있고 의미까지 있으면 제일 좋지만. 하하!”

두 사람은 다음 작품도 함께 구상하고 있다. 영화계에서는 벌써부터 ‘이석근 감독은 아이디어가 많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김정민 대표는 인터뷰 말미 “감독님이 오랜만에 해피한 명절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이석근 감독은 장모 이야기를 꺼냈다.

“시사회 때 장모님이 뒤에 앉아 계셨다. 다 보고나서 제 손을 잡으시더니 ‘이 서방 고맙네!’ 하시더라. 죄송하고 뭉클했다. 집사람이 ‘우리 남편 잘 쓴다’ ‘될 것 같다’고 해준 말이 큰 힘이 됐다.”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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