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때 상사옆 ‘左男右男’… 폭로자들 따돌림 ‘2차 피해’는 여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미투 6개월]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4월 대구 북구 경북대 본관 앞에서 여성단체 관계자들이 ‘#MeToo’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어 보이며 성추행 의혹 교수의 징계를 촉구하고 있다. 동아일보DB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4월 대구 북구 경북대 본관 앞에서 여성단체 관계자들이 ‘#MeToo’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어 보이며 성추행 의혹 교수의 징계를 촉구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요즘에는 좌남우남(左男右男)이 대세예요.”

은행원 김모 씨(28·여)가 전한 요즘 회식 자리의 풍경이다. 김 씨가 입사한 2016년 이후 지난해 초까지 회식에 참석하면 남자 지점장 옆에는 늘 젊은 여직원이 앉았다. 김 씨도 내키지 않지만 분위기 때문에 회식 자리에서 지점장 옆에 앉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중간급 간부들이 나서서 지점장의 오른쪽, 왼쪽 모두 남자 직원을 앉힌다. 지점장도 ‘여직원이 술시중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올까봐 이런 자리 배치를 선호한다고 한다. ‘2차’로 노래방을 가던 관행이 사라졌고, 오후 9시 이후에는 법인카드 사용을 금지하는 기업도 있다.

대학도 달라지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교수와 학생의 면담이다. 예전에는 교수들이 자기 연구실로 학생을 불러 문을 닫고 대화를 나누는 ‘일대일 밀실 면담’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미투 운동 이후 교수들은 ‘개방 면담’을 선호하고 있다. 서울예대에 재학 중인 박모 씨(23·여)는 1일 “연구실에 상담하러 가서 문을 닫으려고 하면 교수가 ‘열어둬라’고 한다”며 “교수들이 학생들보다 미투를 더 많이 의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지현 검사(45)가 올해 1월 29일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52)에게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하면서 한국 사회에 미투 열풍이 분 지 6개월이 흘렀다. 시민들은 일상에서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미투 이후…을(乙)의 눈치를보는 갑(甲)

직장 상사, 대학교수 같은 ‘갑(甲)’의 위치에 서 있던 사람들이 먼저 ‘을(乙)’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하는 것이 가장 몸에 와 닿는 변화다.

연극배우 A 씨(27)는 미투 이후 달라진 극단 분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예전에는 발성 지도를 할 때 남자 연출가가 자세를 고쳐준다는 이유로 여배우의 허리춤이나 쇄골 부근에 손을 대는 일이 흔했다. A 씨는 “지금은 모든 연기지도가 ‘터치리스(touchless)’로 이뤄진다”며 “터치가 꼭 필요하면 다른 여배우가 연출가를 대신해서 한다”고 전했다. 연기지도 과정에서 ‘요염해 보여야 한다’ 등 성적으로 민감하게 들릴 수 있는 표현도 사라졌다고 한다.

문제의 소지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기업들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회식 자체를 피하는 분위기다. 한 유통업체 회계팀에 재직 중인 3년 차 직장인 B 씨는 “미투 이전에는 1주일에 세 차례 회식을 할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줄었다”고 말했다.

대기업 계열사에 다니는 한모 씨(26)는 “상사들이 ‘혹시 이런 것도 미투가 되느냐’고 먼저 물어보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윗사람들이 말과 행동을 돌아보고 조심하게 된 것만으로도 상당히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성폭력은 감춰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피해자들은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따르면 성폭력 지원 기관인 해바라기센터·여성긴급전화1366에 피해를 상담한 건수는 올 1분기 기준 1만1392건으로 지난해 1분기(8442건)에 비해 약 35% 늘었다.

●2차 피해 우려에 위축되는 피해자들

하지만 피해를 폭로한 사람들은 극심한 2차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올해 3월 8일부터 7월 16일까지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 266건을 분석한 결과 119건(44.7%)이 ‘2차 피해’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2차 피해는 △‘배신자’라는 낙인과 따돌림 △부당전보 및 부당해고 △‘꽃뱀’ 등 악의적 소문 △가해자로부터의 역고소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진다.

한 예로 고은 시인은 자신의 성희롱·성추행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폭로한 최영미 시인(57·여)과 박진성 시인(40)에게 각 1000만 원, 이를 보도한 본보와 동아닷컴, 취재기자 2명에게 10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다.

최 시인은 “오래된 악습에 젖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불쌍한 사람의 마지막 저항이라고 생각한다”며 “최영미와 고은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노벨상 후보, 문단의 거목이라는 껍데기와 알맹이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이어 “민족문화의 수장이라는 후광이 그의 오래된 범죄 행각을 가려왔다”며 “이 재판에는 제 개인의 명예뿐 아니라 이 땅의 사는 여성들의 미래가 걸려있으므로 제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겠다”고 말했다.

정현백 여성가족부장관은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열린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 소송에 대해 “전형적인 2차 피해”라며 “법률지원을 포함한 다양한 지원을 준비하고 있고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바른미래당 신용현 의원은 “(이번 소송은) 미투 운동으로 용기 내 고발했던 사람들에게 ‘고발하면 큰 코 다친다’는 사인을 줬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직장인 C 씨는 올 4월 1년 넘게 이어져 온 직속 상사의 성추행과 성희롱을 사내 고충처리위원회에 제기했다. 그러나 문제 제기 뒤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난 것은 가해자가 아닌 C 씨였다. 부당전보의 근거는 ‘업무 능력이 안 좋고 불성실했다’는 인사평가 내용.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은 바로 직속 상사였다. 결국 C 씨는 병가를 내고 휴직했다.

이렇다 보니 ‘피해를 호소했다가는 자칫 나만 다친다’는 인식이 퍼져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축시키고 있다. 한 대기업 사원 조모 씨(27·여)는 “미투를 한 사람들의 일상이 망가지는 걸 보니 ‘폭로를 하면 저렇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무기력해진다”며 “피해자들이 제대로 구제받지 못한다면 미투 운동의 효과가 이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은지기자 eunji@donga.com
#미투운동#성추행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