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리지’ 톡톡]‘나일리지’는 일등석 공짜표가 아닙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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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 ‘나일리지’를 아시나요? 나이를 마일리지처럼 적립해 권위를 내세우는 ‘꼰대’를 이르는 말입니다.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어른 공경’이 중요한 한국 사회에 ‘나일리지 타파’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정당한 지적조차 ‘꼰대짓’이 되어버려 고충을 겪는 이들도 있습니다. 》
 
▼ 나이가 벼슬이야! ▼

“공원 분수대에서 자리 양보를 강요당한 적이 있습니다. 더운 날씨에 분수대 옆에서 맥주 한 캔 마시려 했는데 할아버지 두 분이 오시더니 다짜고짜 비키라고 하시더군요. ‘옆에 자리 많지 않냐’라고 했더니 ‘다른 데는 물이 많이 튄다’며 제 자리가 명당이라며 얼른 가라고 소리치셨어요. 왠지 억울해서 ‘저는 물 맞아도 되는 겁니까’라고 말했는데 ‘너 몇 살이냐. 젊은 놈이 물 좀 맞으면 되지’라며 삿대질을 하시더라고요. 나이를 마일리지처럼 적립해 ‘꼰대’처럼 행동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참 답답합니다.”―김대철 씨(30·회사원)

“점심 메뉴 제안했다가 ‘어른한테 대든 버릇없는 놈’이 됐어요. 회사 선배가 며칠 내내 일방적으로 점심 메뉴를 고르더라고요. 조심스럽게 ‘오늘은 다른 메뉴 도전해보면 어떨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선배도 웃으며 좋다고 하셨죠. 가게에 들어가 주문을 하자마자 선배가 ‘다른 메뉴가 먹고 싶어도 그렇지. 어디 어른을 길에 세워 놓냐’며 ‘나중에 네 후배한테나 그렇게 해주든지’라고 잔소리를 시작하데요. ‘어른’이란 단어에 부아가 치밀었습니다.”―양모 씨(40·회사원)

“하루 한 번 있는 티타임에 수간호사님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드렸다가 혼났습니다. ‘난 따뜻한 게 좋은데 얘는 부서장 취향도 모른다’며 한참을 비꼬더라고요. 날이 더워 차가운 음료를 준비한 것뿐인데…. 취향까지 파악해 ‘커피 셔틀’을 해야 하나요? 결국 나이 어리고 직급 낮은 제가 새로 타드렸네요.”―최모 씨(27·간호사)

“유교문화 영향으로 우리나라에는 장유유서 규범이 남아 있어요. 나이를 기준으로 채용과 승진이 이루어지는 규정이나 부모와 자식 간 위계적인 관계가 그러하죠. 한편으로는 시장 논리의 확장과 민주주의의 발달로 나이는 급격히 그 의미를 잃고 있습니다. 반대로 유교적 사회윤리에 익숙했던 세대는 나이가 들수록 위축되어 가는 자신들의 존재를 집단적으로 드러내고자 합니다. 모든 걸 과거의 기준으로 판단해 ‘젊은 것들’에 대한 공격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죠.”―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 어린 데다 여자라서? ▼

“6·13지방선거 기간에 택시를 탔다가 불편한 경험을 했습니다. 기사님이 한창 선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백미러로 제 얼굴을 살피더니 ‘근데 학생은 어리고 여자라서 정치엔 별로 관심 없지?’라고 하는 거예요. ‘관심 있어요’라고 대답했더니 ‘이런 것도 아느냐’라며 저를 계속 평가했어요. 본인이 더 오래 살았으니 남을 가르쳐도 된다는 태도가 매우 불편했습니다.”―윤효진 씨(21·대학생)

“정부 연구용역에 참여했을 때 남자 공무원에게 차별당한 적이 있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회식을 하러 갔어요. 본인이 술을 돌리겠다며 사람들의 잔을 전부 모아 갔는데 제 잔만 안 가져갔습니다. 처음에는 ‘내 잔을 못 봤나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제 잔엔 술을 따라주지 않았어요. 직접 잔을 드렸더니 ‘젊은 여성이라 술을 못 마시는 줄 알았다’고 되지도 않는 변명을 했습니다. 다행히 주변 분들이 ‘차별하지 말라’고 일갈을 놓아주셨죠.”―문모 씨(25·대학원생)

“부동산중개소에 갔더니 공인중개사가 다짜고짜 ‘보증금, 월세는 얼마까지 생각하고 왔어?’라고 반말을 하는 거예요. 불쾌했지만 ‘대학가 부동산이라 그런가 보다’ 하고 참았죠. 그런데 제 뒤로 들어온 남학생 두 명한테는 친절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존댓말을 쓰더라고요. 어린 데다 ‘여학생’이라 더 만만하게 봤던 게 아닐까 싶어요.”―김은서 씨(24·대학교 4학년)

▼ 혹시 당신은 꼰대 꿈나무?

“제가 89년생 08학번인데 10년 동안 나이를 속인 대학 동기 A가 있어요. 재수해서 한 살 많다고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형 행세를 했죠. 07학번 선배들과도 말 놓고 지내며 동기들 사이에서 굉장히 권위적으로 행동해 과대표까지 맡았습니다. 10년이 지난 뒤 영화 ‘식스센스’급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재수를 했던 다른 동기 형이 슬쩍 A의 지갑에서 삐져나온 ‘민증’을 봤는데 ‘88년생’이 아닌 ‘89년생’이 떡하니 적혀 있던 것이죠. 그렇게 형 노릇이 하고 싶었던 걸까요.”―정모 씨(30·회사원)

“젊은이들 중에도 고루한 사람이 있어요. 대학생 때 팀 과제를 하던 중 제가 잘못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보다 두 살 많던 남자 선배가 저를 따로 부르더라고요. 사과를 하고 제 행동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려는데 선배가 소파에 몸을 푹 기대더니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고 ‘쉿’ 하더군요. 그러고는 제게 ‘이건 사회생활 팁인데 어떤 상황이든 그냥 죄송하다고만 해. 군대에선 그렇게 한다’라고 말했어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서 대답도 못 하고 겨우 고개만 끄덕였네요.”―김모 씨(24·회사원)

“신입사원 연수 받을 때 동기들 평균 나이보다 네다섯 살 많은 사람이 있었어요. 말끝마다 ‘형이 너네 좋아하는 거 알지? 오빠가 다 챙겨줄 테니 나만 믿어’라고 하는 통에 자연스럽게 상하관계가 형성됐죠. 밤이면 동기들 불러내서 ‘자산운용법 가르쳐 주겠다’, ‘술 마시는 법을 잘못 배웠다’느니 훈수도 뒀습니다. 선배들 앞에서는 어찌나 아양을 떨던지 ‘세상 참 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이모 씨(20대·기업 마케팅팀 근무)

▼ 소통과 배려가 중요

“물론 막무가내로 ‘나이부심’을 부려선 안 되지만 정당한 충고마저 ‘꼰대 잔소리’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봐요. 제 선배는 보고서 형식을 틀리는 후배에게 ‘형식 맞춰야 한다’라고 지적했다가 후배 동기들 사이에서 한동안 ‘꼰대’라고 욕을 먹었답니다.”―김수근 씨(31·기업 인사팀 근무)

“베이비붐 세대인 리더들은 먼저 패러다임부터 바꿔야 합니다. ‘헝그리 정신’만 찾으려 하다 보면 ‘앵그리 버드’ 되기 십상이죠. 스스로 물어보세요. ‘당신이라면 당신의 자녀를 당신과 같은 상사 밑에 보내고 싶겠는가’ 하고 말이죠. 신세대의 최대 가치는 개인주의와 공정성입니다. 문제는 자칫 조직 내에선 부정적 인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죠. 직장 선배는 경험을 바탕으로 노하우를 쌓아온 사람이에요. 많이 묻고 배워야 합니다. ‘딸랑맨’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대답해 보완점을 이야기하는 성의를 보이라는 뜻입니다. 선배의 기술을 존중하고 배우려는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김성회 CEO리더십 연구소장

“나이가 많다고 무조건 양보를 바라거나 ‘내가 젊을 적엔 그랬다’며 훈계를 해선 안 돼요. 다만 젊은이들도 노인을 배려해주면 좋겠어요. 나이가 드니 안 아픈 구석이 없습니다. 귀가 안 좋아지니 내 목소리가 잘 안 들려 크게 말하게 되죠. 손잡이를 잡지 않고선 지하철 환승통로 계단을 오를 수도 없어요. 바삐 오르는 젊은이들 길 막을까 봐 최대한 몸을 벽 쪽으로 붙입니다. 그래도 째려보거나 가방으로 얼굴을 치고는 사과도 않고 가는 젊은이들이 있어요. 서로가 배려해야 합니다.”―윤두임 씨(81)

“서울 용산구에 있는 노인생애체험센터에서 노인 세대가 겪는 불편함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음료수의 유통기한조차 확인하기 힘들더라고요. 퇴화된 근력을 체험하기 위해 손발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관절엔 빳빳한 판자가 들어간 체험 기구를 둘렀습니다. 서 있기만 해도 힘이 드는데 신발을 신고 벗고 바닥에 앉았다 일어나니 진이 다 빠졌어요. 청년과 학생들이 꼭 체험해보길 바라요. 어르신들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서혜린·진예은(22·이화여대 간호학과 4학년)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김수현 인턴기자 성균관대 사회학과 4학년
#나일리지#꼰대#어른 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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