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 ‘숨은 권력’ 입법고시 출신의 명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6일 18시 04분


코멘트

퇴근길 정치

3월 21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가 열린 본청 508호. 소위원장인 자유한국당 이종배 의원이 지난해부터 심사가 밀린 법안 51건을 일괄 상정했다. 1호 안건으로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안이 올라왔다. 취약 계층을 위한 ‘문화누리카드(문화이용권)’를 문화예술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여행과 체육 활동에도 쓸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전문위원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이 소위원장)

“검토 의견을 말씀드리면 이미 실시되고 있는 이용 범위에 맞춰 법 규정을 정비한 것으로, 타당한 입법조치라고 봤습니다.”(조의섭 전문의원)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정부 의견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이 소위원장)

“전문위원 검토 보고처럼 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용합니다.”(나종민 1차관)

이후 개정안 심사는 일사천리였다. 이 소위원장이 의원들을 둘러보며 “토론하실 위원님 안 계십니까”, “원안대로 의결하는데 이의 없으십니까”라고 차례로 물었다. 의원들의 별다른 대꾸가 없자 개정안은 불과 심사 몇 분 만에 소위를 통과했다.

이는 법안 처리의 첫 관문인 국회 상임위 소위원회에서 쟁점이 없는 법안을 다룰 때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풍경이다. 국회사무처 공무원으로 각 상임위에 배속된 전문위원과 입법조사관은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한 축이자 ‘숨은 일꾼’들이다. 여야 간, 국회와 정부 간 기 싸움 속에 이들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고 있지만 높은 전문성으로 입법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 입법부의 ‘숨은 권력’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 입법 과정의 ‘숨은 실세’

법안 심사는 각 상임위 법안심사 소위에서 전문위원으로부터 법안의 제·개정 이유와 수정 의견 등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수석전문위원(차관보급)과 전문위원은 국회사무처 5급 공채인 입법고시 출신의 비율이 매우 높다. 의원들이 각 분야 법안의 세부내용을 모두 파악하는 데 물리적 한계가 있어 맥을 짚어주는 게 이들의 주요 임무다. 그러다 보니 전문위원이 정한 방향성이 의원의 판단에 영향을 줄 때가 많다.

한국당의 한 초선 의원은 “이전에 다뤄봤던 문제가 아니면 다른 의원이 낸 법안을 깊이 알기 힘들다. 법안이 필요한 지 판단할 때 전문의원의 검토 의견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교수 출신의 한 전직 의원은 “적지 않은 의원들이 소위원회에 제출된 법안에 대한 별다른 배경지식 없이 참석한다. 여야 간 이해가 엇갈리는 일부 쟁점 법안을 제외하면 전문위원이 낸 의견에 동조하는 식”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국회가 정부가 보내온 법을 통과시키기만 하는 것을 꼬집어 ‘통법부’ 역할을 한 권위주의 정부 시절과 달리 행정부와 입법부의 관계는 이제 역전됐다. 자연스레 입법고시 출신들의 영향력도 커졌다. 중앙부처 관료를 지낸 한 의원은 “의원은 낙선하면 국회를 떠날 인물이지만 입법고시 출신 전문위원들은 국회 터줏대감이다. 각 부처 공무원들이 국회에서 의원들 못지 않게 이들 전문위원들을 부쩍 챙기는 이유”라고 말했다.

기획재정부가 국회 본회의 전 ‘마지막 관문’인 법제사법위원회를 로비 창구로 활용해 문제로 지적된 것도 전문위원의 파워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은 지난해 9월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기재부가 소관 상임위에서는 반대하지 않고 법사위 전문위원을 찾아가서 얘기하는 것이 점점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법안 문구를 다루는 법사위에서 전문위원을 설득해 법안의 발목을 잡는 행태를 꼬집은 것이지만 전문위원의 입법 과정에서 실질적인 내용도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검토보고서 잘 써 달라” 읍소

전문위원의 힘은 ‘검토 보고서’에서 나온다. 국회법은 안건을 심사할 때 먼저 전문위원의 검토 보고를 듣는다. 전문위원은 모든 법안을 미리 살펴본 뒤 보고서를 작성해 상임위 상정 48시간 전에 의원들에게 배부한다. 의원들은 대개 법안보다 전문의원의 의견이 담긴 검토보고서를 먼저 접한다. 한 보좌관은 “검토보고서를 토대로 회의를 진행하니 그 보고서야말로 입법 논의의 출발점이자 결정적 변수”라고 말했다.

법안을 통과시키거나 막아야 하는 의원이나 부처 공무원, 이해관계자들은 검토보고서에 담기는 문구 하나에 목숨을 건다. 국회에서 10년을 활동한 보좌관은 “발의한 법안에 대한 검토보고서에 전문위원과 이를 보좌하는 입법조사관이 부정적인 의견을 담으면 (그 법안은) 끝났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검토보고서가 나오기 전에 의원이 직접 전문위원을 찾아가 발의한 법안의 취지를 설명하거나 설명 자료를 전달하기도 한다.

전문위원과 입법조사관을 상대로 한 부처 공무원들의 구애 작전도 활발하다. 한 보좌관은 “부처 공무원들은 중점 처리 대상 법안에 대해 미리 작업을 한다. 검토보고서에 쟁점을 모호하게 다루도록 읍소하거나 관련 자료를 전문위원이나 입법조사관에게 갖다 바친다”고 말했다. 온갖 노력을 했는데도 전문위원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부처는 고민한다. 한 중앙부처 공무원은 “전문위원을 더 설득할지, 상임위 의원들을 상대로 설명할지, 아니면 법안 수정안을 낼지 결정해야 한다. 전문위원이 국회의 숨은 실세”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상임위에 전문위원이 새로 임명되면 소관 부처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관계자들이 줄을 서서 업무보고를 하는 진풍경도 빚어진다. 한 경제부처 고위공무원은 “부처로서는 국회 공무원이 ‘갑’이다. 특히 예산안 검토보고서에 부정적인 의견이 담기면 그대로 예산이 삭감될 수 있어 평소에 관계를 좋게 유지하려고 애를 쓴다”고 말했다.

● 입법고시 출신들의 명암

입법고시 출신 국회 공무원들이 입법 과정에서 ‘숨은 권력’이라는 말까지 듣지만 그렇다고 ‘장미빛 인생’이기만 한 것은 전혀 아니라는 하소연도 적지 않다.

18대 국회 이후 의원들의 법안 발의 건수가 폭증해 검토보고서 쓰는 것만도 허덕대기 일쑤다. 한 입법조사관은 “상임위 회의가 몰려 있는 정기국회 때는 몇날 며칠 집에도 못 가거나 겨우 씻고 나올 때도 있다”고 말했다. 특히 요즘은 여야가 파행을 이어가다가 갑자기 극적 합의로 상임위 일정을 재개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끝도 없이 대기하면서 보좌진이나 기자들에게 “언제 합의가 될 것 같으냐”고 수소문하고 다니기도 한다.

여야가 갈수록 극한 대립을 반복하다 보니 합리적으로 정책 조언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줄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다보니 ‘양비론’으로 흐르는 검토보고서를 써야 할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야당 정책위원회에서 활동하는 한 당직자는 “쟁점 법안의 경우 어느 한쪽으로 결론을 내면 다른 당 의원들이 호통을 치고 난리가 난다. 그러다보니 입법조사관들이 ‘취지는 좋으나 이런 점도 있고, 저런 점도 있다’는 식으로 두루뭉수리 쓸 때가 많다”고 말했다.

한 해 입법고시 선발 인원이 20명 안팎으로 소수인 데다 퇴직할 때까지 국회에서 같이 근무하는 ‘작은 사회’이다 보니 폐단도 있다.

지난해 8월 두 명의 수석전문위원이 각각 성추행과 출장비 상습 횡령으로 면직 처리됐다. 특히 여성 부하 직원 성추행 사건은 5개월가량 내부에서 쉬쉬하다가 언론 보도 이후에야 국회가 감사에 착수했다. 민주당 이훈 의원은 “(비위를 서로 묵인하는) ‘입법고시 카르텔’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외부감사관 제도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