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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고미석]‘찌끄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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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고미석]‘찌끄레기’

고미석 논설위원 입력 2018-05-09 03:00수정 2018-05-0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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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상파 TV가 ‘말의 힘’이란 실험 다큐를 방송한 적이 있다. 갓 지은 쌀밥을 두 유리병에 나눠 담고 각 병에 ‘고맙습니다’ ‘짜증 나!’라는 문구를 써 붙였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두 개의 병을 전달한 뒤 한 달 동안 ‘고맙습니다’ 밥에는 칭찬의 말을, ‘짜증 나!’ 밥에는 부정적 말을 들려줄 것을 주문했다.

▷4주 후 모든 병을 회수했더니 한눈에도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고맙습니다’ 밥에는 군데군데 하얀 곰팡이가 생기고 누룩 냄새가 난 반면, ‘짜증 나!’ 밥은 시커먼 곰팡이에 뒤덮인 채 썩어 버렸다. 참가자들은 “밥풀에 귀가 달린 것도 아닌데…”라며 놀라워했다. 이를 응용한 실험으로 일부 학교는 학생들에게 긍정적 언어의 힘을 깨우쳐 주기 위해 칭찬받는 고구마와 그렇지 않은 고구마의 생육실험을 종종 활용한다.

▷말 한마디가 쌓여 무생물이나 식물에 변화를 불러온다 치면 하물며 사람한테 미치는 파장은 오죽할까. 오늘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도, 좌절을 안겨줄 수도 있다. 2016년 경기 부천시의 한 어린이집에서는 보육교사들이 만 두 살배기 아이들을 ‘찌끄레기’(‘찌꺼기’의 사투리)라고 불렀다. “빨리 먹어 찌끄레기들아” 같은 발언으로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학대한 혐의로 기소된 보육교사 등 4명에 대해 최근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영아이므로 정신건강의 유해 여부를 확인할 수 없고, 따라서 학대가 아니라는 판단이다.

▷법률적으로는 무죄라고 해도 도덕적 윤리적으로도 그럴까. 어린 새싹들에게 긍정의 말을 심어주진 못할망정 대놓고 폭언을 한 행위는 마음 밭에 독이 든 씨앗을 뿌린 것에 빗댈 수 있다. 말은 세상을 바꾸는 힘도, 엄청난 파괴력도 갖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라고 해서 말의 폭력에 무심하고 둔감한 사회. 현실에서나 인터넷에서나 막말이 홍수를 이루는 사태. 이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말의 타락을 부채질하는 것은 아닐까.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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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힘#긍정적 언어#폭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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