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사회] ‘25인승 미니버스에 40인 탑승’…농촌버스 안전불감증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3일 19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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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버스 복도(중앙통로)에 깔개 놓고 앉았당께”

일주일에 2, 3차례 전남 영암군 미암면으로 밭일을 나가는 시종면 A 마을 주민 강모 씨(80·여)는 기자에게 평소 버스를 탔던 경험을 말했다. 1일 전남 영암군에서 8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 버스를 지칭한 것이다. 강 씨는 “많으면 40명씩 탈 때도 있다”라고 증언했다. 사고 버스는 25인승이다. 강 씨 설명이 사실이라면 불법 운행이다.

사고 버스는 2인승 좌석이 중앙통로를 두고 나란히 배치된 구조다. 농번기를 비롯해 용돈벌이가 필요한 날이면 할머니들이 몰리는 탓에 통로에 놓고 앉아 48분 거리를 오간다고 한다. 탑승 인원을 초과해 운행하는 ‘농촌운전의 안전불감증’ 실태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 인원 늘리려 안간힘…안전은 뒷전

농촌 운전의 안전불감증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삼각 계약관계’가 존재한다. ‘밭주인’→‘운전기사’→‘모집 반장’ 순서로 일손 요청이 전달되는 구조를 말한다. 사고가 난 전남 영암군 시종면 A 마을과 반남면 B 마을도 이에 해당한다. 특히 홍보·모집 역할을 하는 ‘모집 반장’은 할머니들이 받는 일당 7만 원 보다 평소 1만~2만 원을 더 받는다. A 마을 주민 안모 씨(62·여)는 “농번기에는 모집 반장 일당이 더 뛴다. 마을에 따라 30명 이상을 모집하면 일당의 2배 정도(12만~14만 원)를 지급한다”라고 증언했다.

운전기사도 마찬가지다. 탑승 할머니 한 명 당 1만5000원을 받는다. 밭주인이 일손 소개를 대가로 운전기사에게 지급하는 일종의 수수료이다. 할머니들이 많이 탑승할수록 운전기사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탑승 인원이 수입과 직결되는 구조다.

이처럼 탑승 인원 챙기기에는 안간힘이지만 정작 별도의 안전 점검은 없다. 강 씨는 “안전벨트는 잘 안 맸던 거 같다. 그 날(사고 당일)은 다행히 사람(탑승 인원)이 적은 편이었다. 30~40명 탔으면 더 죽었지. 무서워서 오늘은 일 못 나갔다”라고 말했다.

새벽 일찍 운행하는 탓에 고령의 운전자에게 수면이 부족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주민 최모 씨(74·여)는 “운전 준비하려면 새벽 3~4시에 일어나다 보니까 오후 되면 잠이 부족해서 노곤해진다는 (운전자의) 말을 종종 들었다. 이게 농촌의 현실인데 어쩌겠느냐”라고 한탄했다. 경찰 관계자는 “시골 외딴 마을이라 상시적으로 교통 단속에 나서기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불법 현장이 적발되면 엄중히 처리하겠다”라고 밝혔다.

● “들리지 않는 운전자 목소리”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도로교통공단과의 합동 현장조사에 이어 사고 버스 블랙박스 분석 등을 통해 최초 사고원인 규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경찰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블랙박스 속에 녹음된 사고 당시 음성이다.



사고 버스 블랙박스 영상을 보면 2차로를 달리던 사고 버스는 1차로를 주행 중이던 흰색 코란도 차량 우측 사이드미러를 스친 뒤 10초가량 ‘갈지(之)자’ 형태로 아찔한 곡예운전을 이어간다.

영상 원본에는 음성도 담겨 있지만 경찰은 유족과 마을 주민들의 정신적 충격을 고려해 공개하지 않았다. 경찰에 따르면, 당시 여러 할머니들은 놀라 비명을 지르지만 운전자 이모 씨(72)의 음성은 전혀 담기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차량 결함 사고의 경우 운전자가 당황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런데 이번 사고 블랙박스에는 운전자의 목소리가 없다. 졸음운전이나 발작 등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수사 중이다”라고 밝혔다. 경찰은 국과수 조사 결과 발표 전까지는 공식 입장을 표명하지 않겠다는 계획이다.

경찰은 운전자 이 씨 유족 측의 동의를 받아 이날 국과수에 시신 부검을 맡겼다. 경찰은 사고 당시 이 씨의 상태가 이번 최초 사고 원인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영암=배준우 기자 jjoonn@donga.com
영암=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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