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용돈 주려다…” 온 마을이 초상집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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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버스사고’ 침통한 주민들

“응? 그게 누군디?”

2일 오후 1시경 전남 영암군 시종면 월악리 마을 입구에서 만난 황모 씨(84)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1일 영암군 국도 13호선 주암 삼거리에서 발생한 미니버스 사고로 숨진 이모 씨(82·여)의 남편이다. 기자가 조심스레 이 씨의 이름을 물었지만 황 씨는 기억하지 못한 채 뒷짐을 지고 계속 걸어갔다. 이웃들에 따르면 황 씨는 5년 전부터 치매를 앓고 있다. 최근 증상이 악화됐다고 한다. 그래서 이 씨는 일할 때를 제외하고 늘 남편과 함께 다녔다.

○ ‘영암 사고’는 우리 농촌의 슬픈 자화상

이번 사고로 목숨을 잃은 김모 씨(77·여)는 수년째 자신의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어머니의 나이는 올해 101세. 여든을 앞둔 나이였지만 김 씨는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났다. 일하러 가서 먹을 도시락을 싸고 노모가 먹을 아침상을 차렸다. 오전 5시에 일터로 향해 오후 6시 귀가하는 일과였다. 집에 와서도 텃밭을 가꿨다. 하루 10시간 넘게 ‘무 100묶음 작업’을 완료한 뒤 받는 일당은 7만 원. 김 씨는 그렇게 벌어 생활비를 마련하고 손주에게 줄 어린이날 용돈을 준비했다.

또 다른 김모 씨(74·여)는 이 씨와 김 씨의 출근길 말동무였다. 그는 거동이 불편한 40대 딸을 위해 매일 밭으로 향했다. 주민 최모 씨(74·여)는 “일당 7만 원 타서 한 달에 100만 원씩 딸한테 부치려고 매일 (밭일을) 나갔는데…. 불쌍해서 어떡하나”라며 안타까워했다. 1일 오전 함께 버스를 탔던 월악마을 세 할머니는 그렇게 다 같이 돌아오지 못했다.

종종 이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일을 나갔던 주민 강모 씨(80·여)는 “평소 7, 8명 정도가 같이 일을 나갔다. 마침 그날(1일)이 노동절이라 자식들이 집에 온다며 몇 명이 이래저래 빠져서 3명만 갔는데 그렇게 됐다. 잠들기도 무섭다. 자고 일어나면 한 사람씩 사라지는 것 같아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날벼락 같은 비극에 마을 전체는 침통한 분위기였다. 현재 월악리 주민은 300명 남짓. 대부분 60대 이상 노인이다. 마을 이장 김순오 씨(69)는 “젊은 사람은 없고 나이 드신 분만 있다. 아마 10년만 지나도 마을이 텅텅 빌 것이다”라고 말했다.

○ “미리 말렸어야 하는데…” 애끊는 후회

이날 월악리 마을회관에는 안부 전화가 빗발쳤다. 사고 피해자가 아닌데도 부모가 걱정된 자녀들이 안부 전화를 건 것이다. 오후 3시경 마을회관을 찾은 이모 씨(35)는 “일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라고 말하며 외출 나간 어머니를 찾아다녔다.

빈소에서 만난 이 씨의 큰아들 황모 씨(61)는 “평소 어머니가 ‘유일한 낙이다. 힘들면 더 다니지도 못한다’고 말씀하셔서 일하는 걸 말리지 못했다. 더 강하게 말렸어야 했는데…. 마지막까지 일만 하다 돌아가셔서 너무 안타깝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사고 당시 블랙박스 영상이 공개됐다. 2차로를 달리던 미니버스가 1차로에 있던 코란도 차량의 조수석 부분과 충돌한 뒤 크게 휘청거리다 가드레일을 뚫고 나가는 장면이 담겨 있다. 처음 충돌 직전 차체의 떨림도 포착됐다. 하지만 블랙박스만 갖고 직접적인 사고 원인을 가리기는 어려워 보였다. 경찰은 이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도로교통공단과 함께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경찰은 “운전 미숙은 물론 차량 결함과 졸음운전 등 가능한 모든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암=배준우 jjoonn@donga.com·이형주·김정훈 기자


#영암 버스사고#교통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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