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라이프] “회의, 흡연, 티타임 줄였더니”…일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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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년 3월 12일 18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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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집중근무제 도입 이후

사진 동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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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만에 아이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아침마다 눈물로 엄마를 붙잡던 세 살배기가 웃으며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퇴근 후 엄마를 봐도 ‘혼자 놀기’를 하던 아이가 어느 새 ‘애교 쟁이’가 됐다. 평소 입 밖에 내지 않던 ‘사랑해’란 말과 함께 스킨십이 잦아졌다. 포동포동 살도 올랐다.

워킹맘 차미경 이마트 품질관리팀 대리(32·여)는 “일하는 방식이 바뀐 후부터 일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무엇보다 눈에 띄게 달라진 아이의 모습에 놀란다”고 말했다.

신세계그룹은 올해 대기업 최초로 주35시간 근무제도를 도입했다. 오전 9시 출근 오후 5시 퇴근이 기본이다. 재계의 첫 파격 실험이다. 시행 후 두 달여가 지난 현재. 신세계의 ‘워라밸 실험’은 순항 중일까. 어떻게 퇴근시간을 줄였을까. 의문을 풀기 위해 기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차 대리의 일상을 쫓았다.

5일 오전 8시 30분. 차 대리가 사내 어린이집에 3살 아이와 함께 나타났다. 방금 전까지 차 대리의 손을 꼭 붙잡고 있던 아이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자 웃으며 엄마에게 손을 흔들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어린이집 앞에서 우는 아이를 한참 달래야 했어요.”

오전 10시. 사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지금부터는 집중근무 시간입니다. 오후 5시 정시 퇴근을 위해 집중근무 시간에는 회의, 흡연, 티타임 등 업무에 방해되는 행동을 삼가주시길 바랍니다.”

오전 10시가 되자 방송이 흘러나왔다. 일반 ‘착한’ 사내방송과 달리 단호하고 조금은 강압적인 말투였다. 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사무실 안팎은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다른 부서에서 걸려오는 업무 협조 전화도 줄었다. 간간이 스탠딩 회의를 했지만 5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다.

말없이 일하는 차 대리 곁을 떠나 6층 흡연실 앞으로 가봤다. “못 들어가요. 지금 잠겼어요”라며 청소 담당 아주머니가 고개를 흔들었다. 카페도 한산했다. 복도에서 개인적인 통화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차 대리도 점심시간인 11시 30분까지 거의 자리를 뜨지 않았다. 계속되는 정적 탓에 지켜보던 기자가 졸음이 올 정도였다.

오전 11시 40분. 메뉴를 정하고 나갈 준비를 서두르는 일반적인 회사 풍경과 달리 차 대리는 동료들과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10분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식당은 북적였다.

“점심 외출 시간을 줄여 일해야죠. 가끔은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기도 해요. 올해는 한 번도 밖에서 점심식사를 한 적이 없어요.”

차 대리의 말에 다른 동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에서 만난 한 대리급 직원이 말했다. “솔직히 진짜 집에 일찍 가게 될 줄 몰랐어요. 외부에 맛 집을 가도 상사와 함께라면 불편한데 그냥 빨리 먹고, 몰아서 일하고 집에 가는 게 좋아요.”

차 대리는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쳤다. 식사 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찾기는 어려웠다.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 업무가 시작했다. 오후 2시가 또 단호한 ‘집중근무 알림방송’이 나왔다. 오전 방송 때보다 차 대리의 손이 더욱 바쁘게 움직였다. 두 번째 집중근무 방송이 나왔다는 건 업무마감까지 3시간 남았다는 소리다.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거나 웹 서핑을 할 시간이 없었다. 차 대리 뿐 아니라 다른 직원들의 키보드와 전화기도 오전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오후 5시. “시한폭탄이 떴다!”

차 대리가 말했다. 퇴근 시간 임박을 알리는 방송과 함께 모니터에 남은 시간 30분이 표시되며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결승선을 앞둔 마라토너 같았다.

오후 5시 5분, 차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팀장이 아직 자리에 있었는데 그냥 나가도 되냐고 기자가 물었다. ‘퇴근할 때는 따로 인사를 안 해도 된다’고 팀장이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아침에 헤어진 모자(母子)가 다시 손을 잡은 시간은 오후 5시 30분. 아이는 엄마를 발견하자마자 와락 품에 안겼다. “엄마 오늘 어린이집에서 말이야….” 아이의 수다가 벌써 시작됐다. 손을 꼭 잡은 모자는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소리 내 웃으며 집으로 향했다. 회사의 워라밸 실험이 되찾아 준 건 모자의 ‘환한 미소’였다.

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

▼“워라밸로 가는 길, 짧고 굵게 일하자”▼

한국 재계에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 때문만은 아니다. ‘삶의 질’을 중시하는 사회문화적 요구와 ‘일의 질’을 높여 혁신을 성취하자는 환경 변화가 배경이다.

전략경영 컨설팅 회사에는 ‘하우 투(how to)’를 묻는 기업이 늘고 있다. 강혜진 맥킨지 시니어 파트너는 “혁신 둔화의 원인을 조직문화에서 찾는 기업이 늘었다.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사이에 태어난 세대)의 새로운 직업관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본보가 대한상공회의소와 대·중소기업 336곳을 설문조사한 결과 상당수 기업이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관련 제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응답 기업의 44.6%가 ’앞으로 워라밸 중심 조직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는 항목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16.7%에 불과했다. 동의한다는 답변은 대기업이 56.5%로 가장 높았고 중견기업(48.8%), 중소기업(38.4%) 순이었다.

응답 기업이 추진하는 워라밸 관련 제도로는 PC오프제 등 시간 단축(50.0%·이하 복수응답), 회의 축소(48.2%), 회식 제한(43.4%), 보고체계 단축(37.3%), 자율근무제 도입(36.7%) 등이 거론됐다. 대기업들은 회의 축소(58.1%)를 워라밸을 위한 최우선과제로 꼽았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인 2020년까지 진행할 특별기획 ’행복원정대 2020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올 한 해 ’워라밸을 찾아서‘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1부는 무너진 워라밸 현장을 소개했다. 2부는 ’기업편‘이다. 일과 삶의 균형 속에 생산성을 높이고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들의 ’워라밸 실험기‘를 다룬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퇴근시간만 당겼다고 워라밸 달성 아니에요”▼

‘김 대리’가 회사에서 실제 일하는 시간은 몇 시간일까.

오전 9시 회사로 출근해 오후 7시58분에 퇴근한다. 평균 근무시간은 10시간 58분이지만 점심시간과 오후에 커피 한 잔 등을 빼고 생산적으로 보낸 시간은 5시간 32분이었다.

이는 대한상공회의소와 전략 컨설팅펌 맥킨지가 2016년 9개 기업 대리 45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다. 보고서는 “야근 할수록 생산시간은 줄어드는 야근의 역설이 만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업무시간에 바짝 일하고 일찍 퇴근 하는 것이 기업과 임직원 모두 ‘윈윈’인 셈이다. 올 초 주 35시간 근무제를 도입한 이마트의 배광수 인사팀장은 “단축 근무 도입은 워라밸보다는 생산성 향상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일하는 방식을 바꿔 몰입도를 높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마트처럼 근로시간 단축에 나선 기업들은 근태 정보 파악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각 개인의 현재 직무 리스트를 만들고 불필요한 것부터 없애지 않으면 ‘몰래 야근’만 는다는 얘기다.

삼성전자도 근무시간 입력 시스템을 우선적으로 개편했다. 기존에는 사원증을 게이트에 찍고 들어가거나 나온 시간만 기록됐다. 시스템 개편 후 출퇴근 시간을 기준으로 하루와, 주당 근무 시간이 자동으로 계산돼 분 단위까지 시스템에 나타난다. LG전자도 지난달 26일부터 사무직을 대상으로 주40시간 근무 시범 운영에 들어갔다. 개인이 자신의 스케쥴을 관리하기 위해 출퇴근 및 비근로시간을 입력할 수 있도록 근태 정보 시스템을 개편했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주52시간 근무 도입 전에는 ‘오늘은 야근 하지 뭐’라는 생각으로 설렁설렁 일하는 날도 있었다면, 시범운영이 시작된 후부터는 하루에 최대 8시간은 넘기지 말자는 목표를 세워 놓고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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