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재 교수의 지도 읽어주는 여자]동화 한편이 이끈 양성평등… ‘삐삐’의 마법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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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유럽의 ‘삐삐 롱스타킹’

스웨덴의 삐삐 마을에서 어린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삐삐 캐릭터를 바라보고 있다. 김이재 교수 제공
스웨덴의 삐삐 마을에서 어린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삐삐 캐릭터를 바라보고 있다. 김이재 교수 제공
《 도전, 설렘, 행복을 찾는 열쇠…. 길 위에는 많은 것이 있다. 눈을 조금만 돌리면 넓은 세상 곳곳에 펼쳐진 보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지리학자 김이재 경인교대 교수가 세계지도를 차근차근 짚으며 영감과 상상력을 불어넣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를 통해 다채로운 방식으로 연결된 나라와 문화, 사람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
 
김이재 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김이재 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말을 번쩍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센 주근깨투성이 아홉 살 소녀. 엄마는 하늘나라에 계시고 아빠는 큰 배의 선장이라 혼자 살지만, 늘 즐겁고 행복함. 심심하면 열기구를 타고 친구들과 세계 여행을 떠남.’

말괄량이 삐삐는 어린 시절 나의 우상이었다. 소심하고 차멀미가 심했던 한국 소녀는 ‘삐삐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꿈에 이끌려 100여 개 나라를 여행한 지리학자로 진화했다. 수많은 곳을 다니며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삐삐의 인기가 높은 나라일수록 어린이가 행복하고 양성 평등적인 사회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삐삐 롱스타킹’의 저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20대 초 미혼모로 힘든 시기를 견디고 30대 후반 작가로 데뷔했다. 아픈 딸을 위해 행복했던 개구쟁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삐삐 캐릭터를 창조했다. 95개국에 소개된 ‘삐삐…’는 18번째로 많이 번역된 책이 되었다. 어린이 체벌 금지와 동물 복지 증진에도 기여했던 린드그렌은 스웨덴 20크로나 지폐 모델이 될 정도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삐삐가 처음부터 환영받은 건 아니었다. ‘삐삐…’가 1945년 출간되자 혹평이 쏟아졌다. 당시 스웨덴은 특별히 여권이 높지 않았다. 스웨덴의 남성 평론가 욘 란드퀴스트는 “말썽꾸러기 주인공 때문에 우리 착한 어린이들이 나쁜 아이가 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한 출판사 편집자는 “버릇없고 고집 센 소녀가 등장하는 책은 출간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삐삐를 읽은 어린이들은 비합리적인 권위에 조금씩 저항하기 시작했다. 소녀들은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꿈을 실현하려 했다. ‘삐삐 세대’로 불리는 이들이 사회에 진출해 목소리를 내면서 스웨덴은 소수자를 존중하는 성숙한 나라로 진보해왔다.

삐삐 마니아가 많은 북유럽은 양성평등이 잘 구현되는 곳이다. 2017년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성(性)격차지수(GGI)가 가장 양호한 나라 1위는 아이슬란드이고, 노르웨이(2위), 핀란드(3위), 스웨덴(5위)도 최상위에 속한다. 삐삐 인형을 갖고 놀며 자란 북유럽 소녀들은 왕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스웨덴 왕위를 물려받을 빅토리아 왕세녀는 피트니스 트레이너였던 평민과 결혼했다니, ‘삐삐 나라’의 공주답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처럼 여성들이 맹활약하는 독일도 삐삐의 인기가 높은 나라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이름을 딴 학교만 170개가 넘고 소녀들은 가장행렬 캐릭터로 삐삐를 많이 선택한다. 독일은 GGI(12위) 상위권이다.

같은 유럽이지만 그리스(78위), 이탈리아(82위), 헝가리(103위)는 상대적으로 여권이 낮다. 재미있는 건 이들 나라 소녀들이 신데렐라형 여주인공이 나오는 동화책을 읽고, 예쁘고 날씬한 공주풍 인형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1억5000만 권 이상 판매된 ‘말괄량이 삐삐’의 마법은 현재 진행형이다. 영국에 소개됐을 때 남성 평론가에게 비판받고 잊혀졌던 삐삐는 동화작가 로런 차일드가 2007년 영어판을 출간한 후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2007년 개정된 한국의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도 삐삐가 등장했다. 최근 한국에서 거세지고 있는 페미니즘 물결에 삐삐도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린드그렌의 고향 X메르비의 삐삐 마을에서는 지도를 보며 흥미로운 곳을 스스로 찾아가는 어린이들을 볼 수 있다. 새해에는 자녀에게 ‘삐삐의 마법’을 부르는 책과 인형을 선물하고 젊은이들이 넓은 세상을 신나게 탐험하도록 ‘삐삐의 지도’를 건네주면 어떨까.
 
김이재 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삐삐 롱스타킹#양성평등#동화#아스트리드 린드그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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