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거리 공연으로 쌀 한가마 값 벌기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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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 가수 ‘가객’

혜원 신윤복의 그림 ‘상춘야흥(賞春野興)’. 간송미술관 제공
혜원 신윤복의 그림 ‘상춘야흥(賞春野興)’. 간송미술관 제공
“눈을 찔러 장님 된 악사 사광이던가, 동방의 가곡 스물네 소리를 모두 통달했다네. 가득 모여 100전 되면 술에 취해서 가니, 어찌 반드시 서평군을 부러워하랴.”―조수삼의 ‘추재기이(秋齋紀異)’ 중 ‘손고사(孫고師·맹인 가수 손 씨)’ 일부

전통시대 가곡, 시조, 가사 따위를 노래로 부르는 전업 가수를 가객(歌客)이라 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의 집에 가비(歌婢)나 가동(歌童)을 두고 노래를 즐기기도 했다. 직업적인 가객은 17세기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8세기 전후로 전성기를 맞았다.

김천택의 시조집 ‘청구영언’에는 가객으로 명성이 높았던 여항육인(閭巷六人)이 등장한다. 장현 주의정 김삼현 김성기 김유기 김천택이다. ‘해동가요’에는 전문 가수들인 ‘고금 창가제씨(古今唱歌諸氏)’ 56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박효관과 안민영이 편찬한 ‘가곡원류’는 편시조 명창과 판소리 명창을 비롯해 40여 명의 기녀를 소개했다.

가객의 일상은 이옥이 지은 ‘가자송실솔전(歌者宋실솔傳)’에 자세히 나온다. 송실솔은 서울에 사는 가객이었다. 실솔곡(실솔曲)이라는 노래를 잘 불러서 ‘실솔’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폭포 아래, 산꼭대기를 찾아다니며 솜씨를 갈고닦은 그는 마침내 득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어쩌다 그가 노래를 부르면 “청중은 모두 귀를 기울이고 공중을 바라보되 그가 누구인 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서평군 이요(李橈)는 음악을 담당하는 노비만 10여 명을 두고, 가무에 뛰어난 여성만 첩으로 삼았다.

성대중이 지은 ‘해총(海叢)’에는 서울의 3대 가객 중 한 사람으로 꼽힌 유송년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유송년은 한량으로 지내면서 노래가 좋아 가산을 탕진했는데, 주로 평안북도 선천 지역에서 활동했던 유명 가객 계함장(桂含章)을 데리고 다니며 관서지방 일대를 유람했다.

가객의 노래는 신분이 높고 부유한 사람이 주로 향유했다. 공연료는 자세한 기록은 없다. 18세기 한양의 대표적인 ‘버스커(busker·거리에서 공연하는 사람)’였던 손고사의 사례에서 생계형 가수의 수입을 추정할 뿐이다. 그의 노래가 절정에 이르면 사람들이 던지는 엽전이 비처럼 쏟아졌는데 열 냥 정도가 모이면 곧 일어나 떠나곤 했다. 열 냥이면 당시 쌀 한 가마 값이다. 부잣집이나 왕실 행사의 공연료 역시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객의 노래는 사치스러운 문화상품이었던 것이다.

강문종 제주대 교수
#조선의잡사#조선#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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