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의 스포츠에세이] 김신욱은 ‘원조 꺽다리’ 김재한을 넘어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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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년 8월 31일 11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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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축구의‘원조 꺽다리’는 김재한(태극마크)이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그는 승리의 파랑새로 통했다. 1977년 10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호주와의 1978아르헨티나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2차전에서 장신 수비벽을 뚫고 헤딩슛을 시도하고 있다. 스포츠동아DB
한국축구의‘원조 꺽다리’는 김재한(태극마크)이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그는 승리의 파랑새로 통했다. 1977년 10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호주와의 1978아르헨티나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2차전에서 장신 수비벽을 뚫고 헤딩슛을 시도하고 있다. 스포츠동아DB
1970년대 한국축구 응원가를 기억하십니까.

“찼다 찼다 차범근 센터링 올려라, 떴다 떴다 김재한 헤딩슛 골인~” “공 잡았다 이회택, 달려라 차범근, 떴다 떴다 김재한 헤딩슛 골인~.” 동요‘비행기’를 개사해 만들어진 노래다. 축구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흥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당시 헤딩슛하면 김재한이었다. 문전에서 공중 볼 따내는 능력은 독보적이었다. ‘원조 꺽다리’였던 그는 191cm의 큰 키를 이용한 포스트 플레이에 능했다. 국내에서 그보다 큰 축구선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며 한국대표팀의 주축 스트라이커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장점 중 하나는 위치 선정이었다. 아무리 키가 크더라도 문전에서 허둥대면 말짱 도루묵이다. 볼의 낙하지점을 찾는 능력이 뛰어난 데가 점프력까지 겸비해 상대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체공시간도 긴 편이라 점프해서 좌우를 훑어보고 패스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아시아권에서는 그와 제공권을 다툴 선수가 없었고, 당시 우리와 월드컵이나 올림픽 예선전을 치렀던 이스라엘과 호주 선수들과 맞붙어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이처럼 화려한 대표선수생활을 보냈지만, 사실 축구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1947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김재한은 어렸을 때부터 신체조건이 월등했다. 축구 야구 육상 등을 하며 중학교까지 보냈고, 김천고에서 축구선수생활을 했다. 딱 1년을 보낸 뒤 대구고로 전학을 갔다.

프로야구 삼성라이온즈 초대 사령탑이었던 고(故) 서영무 감독이 당시 대구고를 지휘했는데, ‘야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딱 1년뿐이었다. 교장선생님이 바뀌면서 모든 운동부가 해체됐다. 고교 3학년 때 대구 성광고로 전학하면서 다시 축구를 택했다.

하지만 실력 부족으로 대학 진학은 어려웠다. 졸업 무렵 실업팀 제일모직에서 실시한 공개테스트를 통해 연습생으로 겨우 입단했다. 기본기가 없어 연습경기 출전은 언감생심이었고, 그냥 훈련을 같이 하며 축구를 배웠다.

뒤늦게 건국대학교에 진학하면서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특히 헤딩능력을 키우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졸업 후 제일모직에서 2년을 뛰었으며, 팀이 해체되는 불운 속에서 주택은행으로 옮기면서 기량이 만개했다.

25세이던 1972년 주택은행이 전국대회 4관왕을 달성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그 해 메르데카컵에서 19세의 차범근과 함께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차범근, 김진국 등이 올려준 볼을 득점으로 연결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그는 1979년까지 8년간 대표팀의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했다.

‘높이의 가치’를 앞세운 그는 A매치 57경기 출전에 33골을 넣었다.

김신욱. 스포츠동아DB
김신욱. 스포츠동아DB

문득 40년 전 대기만성의 대표 격인 김재한을 떠올린 건 신태용호의 ‘꺽다리 공격수’ 김신욱(29· 전북) 때문이다.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시켜 독보적인 존재감을 남긴 김재한이 김신욱의 롤 모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김신욱은 197.5cm, 97kg의 압도적인 체격을 갖춘 K리그 최고의 스트라이커다. 제공권뿐만 아니라 발을 통한 득점에도 능해 전천후 공격 자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도 늦게 핀 꽃이다. 프로 입단 전까지는 무명이었다. 게다가 중앙대학교 다닐 때까지는 수비수였다. 울산 현대에 입단한 뒤에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자 김호곤 감독의 권유로 공격수로 전환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2012시즌 첫 두 자릿수 득점(13골)에 성공했고, 이듬해에는 19골을 몰아쳤으며, 2015시즌에는 18골로 생에 첫 득점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지난 시즌 전북으로 이적한 뒤 부상 등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올 시즌 10골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프로 통산 291경기에서 112골을 넣었다. 수비수에서 공격수로 변신해 K리그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가 됐다는 건 피나는 노력은 물론이고 그만한 재능을 타고 났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국가대표팀에서의 경기력이다. 득점력을 갖춘 데다 높이가 월등한 김신욱은 차별화가 가능한 공격 옵션이지만 지금껏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A매치 37경기에서 겨우 3골을 넣었을 뿐이다. 이런 결과는 김신욱이 제대로 못 뛰었거나, 아니면 감독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다.

과거를 되짚어보면 단순한 공격 패턴이 문제였다. 김신욱이 투입되면 그 순간 동료들은 일단 긴 패스부터 준비한다. 모든 시선과 움직임이 한곳으로 집중되다가보니 공격패턴은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뻥 축구’소리를 들은 이유다. 상대 수비는 그만큼 막기가 쉬웠다. 이러다보니 감독들은 김신욱 활용법을 놓고 딜레마에 빠졌다. 장점이 큰 것은 분명하지만 단점 또한 명확했기 때문이다. 중심에서 비켜난 김신욱은 자연히 플랜 B가 됐다.

즉, 위기에 빠졌거나 분위기 전환이 필요할 때 교체 투입된 것이다. 그동안 플랜 B가 효과를 본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효용가치는 여전하다. 아시아권에서 그만한 신체조건은 드물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또 최근 페이스도 좋다. 그래서 신태용 감독도 이번 대표팀에 선발했다.

원로 축구인 김재한(70)은 스포츠동아와의 통화에서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내가 대표생활을 할 때는 감독님들이 나를 활용하는 전술을 가지고 팀을 운영했다. 그러다보니 볼이 측면으로 빠졌을 때 나는 위치 선정을 어떻게 하고, 그 다음 동작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항상 고민했다. 그런데 그동안 대표팀에서 김신욱은 다급할 때나 지고 있을 때 잠깐 투입하는 조커에 불과하다. 김신욱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훈련할 때부터 김신욱의 장점을 활용한 훈련이 필요하고, 경기에 투입되면 그 때는 김신욱을 적극 활용하는 전술이 따라줘야 한다. 김신욱은 정말 좋은 선수다. 신장이나 점프력, 스피드를 갖춘 데다 발기술도 좋다. 국내에서 그 정도 선수가 나오기 힘들다. 다방면으로 활용해야한다.”

‘원조 꺽다리’ 김재한은 김신욱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제 김신욱이 답할 차례다. 김신욱은 ‘원조 꺽다리’를 넘어설 수 있을까.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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