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도서관]“무서운 건 악이 아니라 시간”…‘살인자의 기억법’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30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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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영하 씨는 ‘살인자의 기억법’에 대해 “내가 써야 하고 나밖에 쓸 수 없다”면서 애착을 보였다. 동아일보DB
소설가 김영하 씨는 ‘살인자의 기억법’에 대해 “내가 써야 하고 나밖에 쓸 수 없다”면서 애착을 보였다. 동아일보DB
그는 악(惡)을 이해하고 싶다고 했다. 그 진부함이 나를 웃겼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악을 왜 이해하려 하시오?” “알아야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말했다.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악이 아니오. 기도나 하시오. 악이 당신을 비켜갈 수 있도록.”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덧붙였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김영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중 일부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개봉을 앞두고 소설도 주목받고 있다.

이미 알려졌듯 소설의 주인공은 70세의 살인자다. 그런데 이 살인자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그는 최근 자신과 같은 ‘직업’을 가졌음을 직감한 사내를 알게 됐는데, 이 사내가 자신의 수양딸과 가깝게 지내고 있다. 그는 사내로부터 자신의 딸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을 어렵게 하는 것은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기억 못함’이다.

김영하 씨는 늘 ‘젊은 작가’로 불렸다. 젊은 나이에 주목받아서만은 아니다. 그는 1997년 낸 소설집 ‘호출’에서 삐삐를 등장시키고 2006년 장편 ‘빛의 제국’에선 e메일과 트위터를 자연스럽게 배치하는 등 작품에 새로운 매체를 등장시키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40대 중반에 발표한 소설이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순문학 주인공으론 낯선 ‘킬러’를 등장시켰는데, 작가 자신이 “손 풀고 간다는 생각으로 썼다”지만 주제는 가볍지 않다.

‘살인자…’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주인공 살인자는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악이 아니라 기억이 담고 있었던 시간임을 알고 있다. 알츠하이머와 싸우는 주인공이 “아무도 시간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오늘의 나를 이루는 것은 그때까지의 기억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 기억이 사라져갈 때 ‘나’의 정체성은 어디에 두어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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